[찻그릇 역사기행(31)] 경주(上)

천년을 이어온 신라인의 차심(茶心)

만추의 신라고도 경주의 하늘은 쪽빛이다. 천년의 세월 찬란했던 신라문화를 묵묵히 가슴에 묻고 고도를 지키며 누워있는 이름없는 왕릉들. 그 너머로 지는 낙조는 신라왕조와 문명의 그림자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다.

경주는 우리 민족문화의 고향인 동시에 기행자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번 경주기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회상의 기행이기도 하다.

지난 추석 기행자는 형님 두분과 함께 고향 경주를 방문하여 성묘하지 않는 대신 노벨상의 고향과 고고학의 나라 스웨덴 왕실의 초청을 받아 왕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나 찻그릇 답사일정 관계로 기행자는 안타깝게도 동행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두분 형님은 스웨덴 왕실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1926년 10월10일 정오 신라의 고도 경주 시내에서는 동아시아 고고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일대 사건이 있었다.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 영롱히 반짝이는 신라 황금보관이 천년의 단꿈에서 깨어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것은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당시 황태자(현 스웨덴 국왕의 조부)와 식민지 청년 고고학도 최남주(기행자의 선친)와 함께 이름모를 신라의 왕릉을 발굴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서봉총 발굴인 것이다.

봉황이 장식된 금관과 함께 파란 유리 찻그릇의 발굴은 5세기말경 신라왕실에서의 음차의식(飮茶儀式)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봉총 신라금관의 발굴을 통하여 스웨덴 왕실과 기행자의 집안은 신분을 초월하여 70년동안 아름다운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스웨덴은 6ㆍ25 동란 때도 우리나라에 의료단을 파견하여 부상장병과 수많은 민간인의 생명을 구해주어 인류애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번에 민족적 경사인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스웨덴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한층 두텁게 해주었다.

기행자는 육군사병 신분으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관계로 연루되어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수인번호187번을 가슴에 달고 1년동안 이해찬(현 민주당 정책의장) 형과 함께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사형선고를 받고도 독서와 사색으로 굳건하게 수형생활을 하던 수인번호 205번의 김대중 대통령을 뵐 수가 있었다. 사선(死線)을 여러 번이나 넘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지는 지금도 기행자의 삶의 도정(道程)에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기행자가 멀고도 험난한 도자기의 길을 처음 가게된 것은 신라고도의 흙과 지천으로 널려있는 토기조각 그리고 선친의 훈도 때문이었다.

여명기 한국의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 개척자이신 선친은 고유섭(미학·미술사학자)과 함께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구(東海口) 유적을 답사하는 등 평생을 신라 문화와 경주를 위해 헌신하다가 1980년에 귀천하셨다.

유년시절 기행자는 선친의 손을 잡고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보고(寶庫)인 남산을 오르내리면서 “이곳이 신라 경덕왕 때 충담스님이 중삼중구날에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한곳이다”라는 선친의 설명이 지금도 아스라히 귓전에 맴돌고 있다.

또한 망성리 토기 가마터를 답사하면서 신라인의 섬세한 예술혼을 느꼈고 현곡면 나태리 청자 가마터, 남사리 분청사기 가마터, 암곡리 조선백자 가마터 등을 답사하면서 흙이 인류문명의 진보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석양 무렵 반월성 언저리에서 남산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신라 화랑이 풍류를 즐기면서 녹차 일배를 하는 환영(幻影)이 스쳤다. 신라왕국은 임금, 신하, 스님, 화랑, 백성 등 모두가 차를 즐기는 `차의 왕국'이었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1/07 20:3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