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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33)] 파칭코(パチンコ)②

[재미있는 일본(33)] 파칭코(パチンコ)②

일본 한 농촌의 허허벌판에 대형 주차장을 갖춘 빠찡꼬점이 문을 열었다.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었던 주변 마을의 농민들이 농한기는 물론 농번기에도 틈만 나면 차를 몰고 찾아왔다.

마을의 음식점과 간이주점이 옮겨왔고 대형 슈퍼마켓과 자동차 정비소, 주차장 등이 뒤를 이었다. 몇년만에 벌판은 번화한 상업지대로 탈바꿈했다. 대신 마쓰리(祭り)를 비롯한 공동체 행사의 참여율이 떨어지고 이웃끼리의 발길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얼마전 한 민방TV가 방송한 이런 줄거리의 다큐멘터리는 빠찡꼬의 영향력을 잘 드러냈다.

빠찡꼬가 이토록 성행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큰 부담이 없는데다 언제든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혼네'(本音ㆍ속마음)와 '다테마에'(建て前ㆍ표면상의 방침)가 다른 일본적 관행의 산물이기도 하다.

모든 도박에 반대하는 여론의 다테마에에 따라 일본에서는 카지노가 철저히 금지돼 있다. 대신 사행심 해소의 돌파구로 경마나 경륜 등이 허용돼 있지만 언제든 경기가 열리는 게 아니고 경마ㆍ경륜장이나 시내 중계소를 찾기도 쉽지 않다. 연중무휴로 오전10시~밤11시까지 즐길 수 있는 빠찡꼬와는 비교할 수 없다.

빠찡꼬는 일본 전자산업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 마이크로칩과 액정 표시장치의 본격적 보급은 거의 빠찡꼬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게 새로운 기종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첨단 부품을 대량으로 소비하고 있다.

또 빠찡꼬는 재일동포 사회 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빠찡꼬점은 물론 기계 생산과 유통, 수리 등을 합친 전체 시장의 80%를 동포들이 장악하고 있다.

재일동포들은 패전 직후 잿더미를 뒤져 고철과 유리, 판자 등 폐품을 찾아 수동식 파찡꼬 기계를 만들었다. 밤을 새워가며 두드리고 펴고 붙이고 못을 박는, 힘들고도 시끄러운 작업이었다. 파찡꼬점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고 사업의 성격상 늘 폭력단에 시달려야 했다.

요즘으로 치면 3D업종이니 일본인들은 외면했다. 반면 심한 차별 속에서 정상적 사회진출의 기회를 박탈당한 재일동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탈출구였다. 일본 경제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빠칭코 산업은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그에 따라 재일동포의 경제력이 커졌고 일본 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최근 빠찡꼬는 어두운 이미지를 많이 벗었다. 우선은 오랫동안 파찡꼬점의 경품 교환소에 관여, 수수료를 챙겨 온 폭력단이 1991년 폭력단방지법 시행 이후의 집요한 단속에 따라 손을 끊었다. 늘 끊이지 않았던 탈세의혹도 CR기의 보급 이후 사라졌다.

현금을 직접 집어넣는 기종은 세무당국이 매출액을 파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도서카드와 마찬가지인 선불카드를 이용하는 CR기는 빠찡꼬점의 매출액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재 일본 전국의 빠찡꼬 선불카드는 2개 회사가 관리하고 있으며 경찰 간부 출신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누구나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빠찡꼬점을 겨냥한 업주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연인과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커플 좌석이나 금연석, 휴게실 등을 갖춘 점포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여성 빠찡꼬 인구가 크게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빠찡꼬의 이미지 변화는 재일동포들의 사업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동안 머뭇거리던 일본인이 기다렸다는 듯 이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거대자본을 동원한 대기업 자회사의 참여는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빠찡꼬점은 신장개업을 하면 한동안 스타터에 쇠구슬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못의 배치를 누그러 뜨리거나 3단계로 된 제어칩을 조정해 당첨확률을 높인다. 수억엔대의 거액을 손해보면서 우선 손님을 끌어들인 후 아주 조금씩 확률을 낮추어 자금을 회수한다.

그러나 고객도 이를 눈치채기 때문에 새로운 기종의 도입 시기 등을 택해 다시 확률을 높여주어야 한다. 이런 풀기와 조이기의 반복에는 일시적으로 거액의 자금이 들어간다.

전국적으로 체인점을 전개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 업체는 자금면의 우위를 활용, 잇달아 영세업체를 밀어내고 있다. 더욱이 금융불안으로 한국계 신용조합의 기능이 거의 정지돼 있어 재일동포 업체의 자금난은 날로 가중되고 있다.

22조엔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시장에서의 지배력 후퇴는 재일동포의 경제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포사회의 금융 불안을 강 건너 불로 여기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가 답답하기만 하다. <끝>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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