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강제규표' 영화

제작자, 감독이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할리우드를 보라. 스필버그는 스필버그 대로, 루카스는 루카스 대로, 타란티노는 타란티노 대로 자기 영화를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 할리우드를 베끼는 우리 영화 제작자들은 유행을 탄다. 자신의 스타일,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요즘 관객이 무얼 좋아할까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것이 몰개성의 유치한 아류를 생산한다.

'쉬리'의 대성공을 놓고 참 말도 많았다. 시기와 질투어린 분석도 나왔고 '운', '아슬아슬한 모험'이란 말도 나왔다. 사실 그런 측면도 있었다.

"남북 긴장과 화해가 혼란스런 시기에 처음 시도한 남북분단을 소재로 한 액션 오락물이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에 도전한 무모함이 어쩌다 사회분위기와 언론의 바람을 타고 성공했다 "는 말도 당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제규의 다음 작품에 더 주목했다. '걱정 반, 시기 반'이었다. 사실 그 부담이 강제규를 짓눌러왔다.

"한국영화 블록버스터의 문을 연 제작자, 감독이다"는 인식도 또하나의 부담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단적비연수'였다.

제작비 40억원, 김석훈(단) 설경구(적) 최진실(비) 김윤진(연) 이미숙(수)의 출연. 그야말로 한국 영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다.

40억원은 강제규 필름의 '통' 을, 그리고 이제는 만들면 '쉬리' 정도는 나와야한다는 기대심리를 반영한 것이고, '은행나무 침대 2'를 내세운 것은 흥행작에 대한 반사이익을 노린 것이다. 그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메랑이 돼 영화의 발목을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단적비연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장면마다 상황전개마다 "저것이 '은행나무 침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라는 강박관념을 주어 편안함과 몰입을 막았고, 영화는 '은행나무 침대2'라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해 가볍고 편안한 결말로 나가지 못했다.

김윤진은 '쉬리'의, 설경구는 '박하사탕'의 강렬한 이미지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도 스타시스템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쉬리'와 '단적비연수'에서 강제규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지향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멜로다. 그의 멜로는 아주 단순하고 전형적이다.

한 남자와 여자가 죽도록 사랑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사랑. 그래서 비극적이다. 그 사랑은 순수하고 운명적이다. 그 비극적 사랑을, 순수한 비극을 강제규는 가장 극적이고 강하게 만든다. 다름아닌 가장 극단적이고 강렬한 운명적 상황에 사랑을 갖다 놓는 것이다.

'쉬리'의 북한 여 테러리스트와 남한의 정보요원이란 상황도, 남북분단의 비극이란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결국은 한석규와 김윤진의 비극적 사랑을 더 강하게 표현하기 위한 무대에 불과하다.

'단적비연수'에서도 극한의 상황은 그대로 이어진다. 철천지 원수인 화산족과 매족의 존재, 그속에서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단과 비, 그 비를 좋아하는 적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비극. 어쩔 수 없기에 부족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에서 개인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 영화는 그래서 더욱 비장하다.

그 몸부림을 강제규 영화는 인물의 내면표현이 아닌 액션이란 외형적 수단을 통해 극대화한다. '단적비연수'도 이미 그 무대를 마련해놓았다.

우리가 사실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영화속 시대배경의 원시성이말로 비극적 사랑을, 그 감정을 가장 강한 1차적인 몸짓(칼과 피)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만약 그 사랑이 현대의 일상에서라면 너무나 유치하고 재미없다. 오히려 웃음만 나올 것이다. 획실히 '강제규표' 영화는 멜로적이고 그 멜로를 가장 강한 상황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좋은 영화란 단순하다.

문제는 그 단순한 이야기나 감정에 얼마만큼 그럴듯한 옷을 입히느냐에 있다. 그런 점에서 강제규 영화는 보다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단지 색깔만으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두번이면 충분하다.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1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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