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종로구 예지동(禮智洞)

2000년 10월, 북한의 조명록(趙明祿)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과 만날 때 군복의 정장을 입은 것이 뉴스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조명록이 입은 군복은 북한군의 정장이다.

조명록은 당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났을 때에는 양복을 입었다가 백악관으로 갈 때는 국무부 내의 방 하나를 빌려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고 한다. 대개의 경우 이럴 때 오히려 양복으로 갈아입는 것이 상례인데 그 반대였기에 화제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군복의 역사는 결코 짧지만은 않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무인상(武人像)이 나온다. 투구와 철갑으로 무장한 장군이 마갑을 입힌 말을 타고 창을 든 모습도 있다.

신라에서는 부대에 따라 복색을 달리 했으며,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는 많은 종류의 군복이 보인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군대 복장이 등장한 것은 조선조 말인 1895년 고종 때 복식규칙을 바꾸면서다. 이 규칙을 보면 군복을 대예장(大禮裝), 군장(軍裝), 예장(禮裝), 반예장(半禮裝), 상장(常裝)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지금의 군인복재에서는 예장, 정장, 전투장으로 축소하였다.

군복은 화려하고 권위와 위엄이 있는 옷이다. 또한 '나라를 지키는 힘'이라는 상징성도 갖는다. 그래서 국가 최고책임자의 공식모임에는 주재국 대사관의 무관이 정장 차림으로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사람이 일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반드시 넘겨야 할 매듭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출생 성년 결혼 사망은 사람이 새로운 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변화의 관문이므로 고대부터 이를 확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성대한 의례(儀禮)가 베풀어졌다.

프랑스 인류학자 방주네프는 1909년 이처럼 개인의 상태, 사회적 지위, 연령 등의 변화에 따라 치러지는 의식을 특별히 '통과의례'(通過儀禮)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양에서는 성인이 되면 치르는 관례(冠禮), 성인이 되어 배우자를 맞이하는 혼례(婚禮), 가족의 죽음을 만나 치르게 되는 상례(喪禮), 그리고 자손으로서의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되는 제례(祭禮), 즉 이 사례(四禮)를 '관혼상제'(冠婚喪祭)'라 했다.

통과의례나 관혼상제는 본질적으로 죽음과 재생의 관념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치를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엄숙한 예(禮)를 갖췄던 것이다.

종로구 예지동은 본디 연화방(蓮花坊)의 효교(孝橋), 하피마동(下避馬洞), 이현(梨峴)의 일부와 중부동, 전간동(田間洞), 상천변동(上川邊洞), 옥방동(玉房洞), 칠방동(漆房洞), 석수방동(石手房洞)을 병합, 1914년 4월1일에 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국립대학격인 성균관(成均館)의 남쪽에 있는, 4학의 하나인 동학당 부근이므로 '예'(禮)와 '지혜'(智慧)를 함양한다는 뜻에서 유학의 대강(大綱)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라 하였던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예지동이라는 땅이름에 걸맞게 오늘날의 예지동에는 예물(시계,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과 예단(비단, 주단, 수의, 혼수 등)의 점포가 즐비하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0/11/1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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