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도심의 새벽 인력 시장

11월9일 오전 4시 서울 관악구 봉천동 로터리에 있는 인력시장. 매서운 입동한파가 살로 파고드는 듯한 새벽, 두툼한 가방을 맨 40~50대의 중년 남자들이 하나둘씩 시장 입구에 나타났다.

안면이 있는 듯 서로 수인사를 나눈 이들은 로터리 도로와 골목 앞에 선 채 일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5시가 가까워지자 수는 더욱 늘어나 주변에는 100명이 넘는 일용직 노동자로 붐볐다. 주변에는 인부들을 구하러 온 봉고차 서너 대가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IMF때보다 더 힘들어졌다"

인력시장 주변에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일거리를 찾아 나온 일용직 인부들로 가득했다.

새벽 한파를 피해 들어온 이 들의 이야기 주제는 한결같이 '겨울나기' 걱정이었다. 30여년간 공사판에서 일했다는 오호균(59)씨는 "요즘은 우리 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은 정말 살기가 힘들다. IMF때는 일당 단가는 떨어졌어도 그래도 일할 곳은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IMF때 보다 일자리 잡기가 더 힘들어졌다"며 "이제 건설업체들의 퇴출로 11월말이면 관급 공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존 공사도 대부분 중단될 예정이라 살기가 막막해졌다"고 하소연했다.

노동자 중에는 70대 노인도 있었다. 43년간 노동판을 전전했다는 김옥배(73)씨는 "IMF 직전에는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5만원까지 올라갔었는데도 인부를 못 구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IMF때 한차례 된서리를 맞았다가 지난해 초부터 차츰 살아나는가 싶더니 올해 9월부터 다시 일감이 줄고 하루 일당도 평균 2만~3만원이 내려갔다"며 "철근공 같은 기술자나 그나마 일자리가 있지 다른 기능공들은 일자리를 못 구해 자포자기한 채 술만 먹고 돌아가기 일쑤"라고 털어놓았다.

이곳에 나온 인부들에 따르면 가장 인기가 있는 철근 기능공의 일당은 최고가 하루 10만원.

그 아래로 미장 타일 조적 기술자들이 6만~7만원 선에서 형성됐다. 공사판에서 잡일을 하는 인부들은 3만5,000원의 일당을 받고도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다 하더라도 요즘에는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예가 많다.

이곳 인력시장의 경우 인부 스카우트를 책임지는 건설 현장 책임자들이 주로 안면이 있는 인부들을 데려다 쓰는데, 최근 건설사가 자금난을 겪는 바람에 인부에게 줄 임금을 제대로 못주고 3~4주 정도 지나서야 지급한다는 것이다.


밀린 품삯, 달래지도 못해

인천에서 왔다는 채모(52)씨는 "보통 현장 책임자들이 인부들을 골라 데려가는데 체불 임금을 독촉하면 다시는 데려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도 밀린 품삯을 달라고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채씨는 "집에서 가까운 부천 소방서 인근에 건설 노동자 인력시장이 있는데 그곳은 일당 수준이 이곳보다 2만~3만원이 낮아 멀어도 이곳까지 온다"고 덧붙였다.

일꾼을 구하는 봉고차가 거의 사라질 새벽 5시45분 무렵, 이곳은 언제 새벽 인력 시장이 있었느냐 싶게 포장마차와 일용직 인부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날 봉천동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100여명이 일용직 노동자 중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철근공 30명 정도가 전부였다.

여기서 일자리를 못 구한 인부들과 보수는 적지만 안정적인 구직을 원하는 노동자들은 인근에 있는 사설 구직센터로 몰렸다. 'G복지인력'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이 구직센터에는 봉천동 시장 터에 있던 인부들보다 다소 젊은 노동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부분 건설 현장과 일용직 노동자들을 연결해주는데 봉천동 시장보다는 일당이 2만~3만원 낮은 5만~7만원 수준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구직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일당의 10%를 중개 수수료로 뗐다.

이 구직센터의 한 직원은 "하루 100여명의 일용직 노동자이 오는데 적게는 30명, 많을 때는 70명 정도가 일자리를 얻는다"며 "지난 달부터 찾아오는 인부들은 늘었는데 일감은 오히려 줄고 일당도 조금씩 내려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일용직 노동시장에 내린 찬서리는 단지 건설직 노동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건설 인력시장이 파장될 무렵인 오후 7시경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 중구 북창동 뒷골목에는 또다른 그룹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중국집의 일용직 요리사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한 집합 장소. 밤이면 단란주점으로 붐비는 이곳 환락가 뒷골목은 오후 8시가 되자 200여명에 달하는 요리사 구인 인파로 북적거렸다.


조선족 중국인 몰려와 구직난 심화

주방장 일을 하러 왔다는 김모(41)씨는 "거의 매일 일자리를 찾아 이 곳에 오는데 일주일에 한두번을 일하기도 힘든 실정"이라며 "대부분이 안정적인 월급제를 원하지만 여름부터 경기가 나빠지면서 지금은 '하루살이 치고 받고'(규모가 작은 중국 집에서 혼자 주방장과 보조 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얻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7살 때부터 중국집에서 일을 해 주방장 경력만 20년 가까이 된다는 김모(35)씨는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중국집 요리사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현재 주방장 400여명, 보조 400여명 등 800여명이 나오는데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임금이 싼 배달꾼 밖에는 없다"며 "더구나 최근에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과 불법 체류 중국인까지 일자리를 얻겠다고 대거 몰려와 더욱 일자리 얻기가 치열해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실제 오후 8시가 조금 넘자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일자리 중개를 하고 있다는 한 소개인은 "보통 한국인 주방장은 한달에 최소 200만~230만원 정도를 요구하고 있는데 중국인은 월 150만원 정도면 서로 하려고 한다. 그렇게 경쟁을 하다 보니 자연 한국 요리사의 임금까지 덩달아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방장 한사람을 구하려 나왔다는 한 중국집 주인은 "요즘 같은 불경기에 되도록이면 임금이 싼 사람을 구하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기술은 다소 떨어지지만 싼 맛에 임시로 고용하는 예가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취재한 결과 이곳에는 한국인 요리사 외에 불법 입국한 조선족이나 중국인도 상당수 확인됐다. 대기인부 중에는 조선족 여성도 10여명 가까이 있었고, 산업연수원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도 있었다.

조선족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혼인을 빙자한 사기도 늘고 있다. 주방장이라는 최모(36)씨는 "지난해 그간 알뜰히 모은 돈 3,000만원을 들여 29세의 한 중국 교포 여인과 결혼 했는데 6개월만에 달아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고 하소연했다.

이곳에 나오는 조선족 여인 중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거나 이처럼 혼인을 빙자해 국내에 들어온 사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새벽 인력시장은 서민의 밑바닥 경기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아직까지 청산 또는 법정관리 처분을 받은 건설사에서 나온 노동자들의 일용직 인력 시장 진입의 기미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불안정하다는 이 시장마저 기존 인력을 소화할 능력을 상실했을 정도로 극심한 불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서민들은 '제2의 IMF' 홍역을 치르고 있는 듯 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14 21:48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