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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뒤죽박죽…인터넷 중독증

가상·현실 뒤죽박죽…인터넷 중독증

사이버 채팅, 가정파탄·범죄 유발하는 '문병별'

지난 10월27일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여자를 성폭행하려다 목졸라 숨지게 한 20대 후반의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 남자는 지난해 말부터 인터넷 채팅에 빠져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었을 만큼 '채팅광(狂)'이었다. 이제 인터넷 중독 현상은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서울 S여중 3학년 박모(15)양은 친구 사이에 '채팅 퀸'으로 통한다. 수많은 인터넷 채팅 사이트의 주소를 다 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시쯤에 가장 많은 남자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지, 무슨 종류의 얘기를 하면 상대방이 가장 좋아하는지 등 채팅에 관한 모든 것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박양의 비법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박양의 하루 일과는 학교 수업과 인터넷 채팅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새벽 2시를 넘기기 일쑤다. 박양은 "수업 시간에도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를 고민할 정도다.


"인터넷 안하면 불안 초조해요"

이 학교 양호교사 김성미(28ㆍ여)씨는 "요즘 들어 하루에 한두명씩은 인터넷 채팅과 관련한 상담을 하러온다"면서 "인터넷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게 대부분의 상담 내용"이라고 전했다.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지난 9월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소년의 14%가 인터넷 채팅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청소년들은 하나같이 '친구보다 인터넷이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여대 안정임(신문방송학) 교수는 "인터넷 중독증(IAD; Internet Addiction Disorder) 가운데 청소년에게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이 채팅 중독"이라며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현실공간 대신 자판을 두드리며 맘에 맞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을 도피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 중독증세가 단지 사이버 세대에게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PC방에서든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대기업인 H상사는 "직원이 채팅을 하기 위해 야근한다"는 소문이 돌자 사무실 컴퓨터마다 어떤 직원이 몇 시에 어느 사이트를 방문했는지 일일이 기록까지 할 정도다.

하지만 인터넷 채팅 중독 증세가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인터넷 채팅을 통한 남녀의 만남이 성범죄로, 극단적인 경우 살인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익명성을 십분 활용,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상대방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남부경찰서는 지난 9월 초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한모(24ㆍ여ㆍH백화점 직원)씨를 성폭행한 강모(30ㆍ무직)씨를 붙잡았다.

경찰조사 결과 6개월 동안 인터넷 회사에서 일한 바 있는 강씨는 업무시간에 인터넷 채팅을 하다가 10여 차례나 직장상사로부터 주의를 받았을 만큼 채팅에 푹 빠져 있었다. 강씨는 "채팅 공간에서 얘기할 때와 실제 만났을 때의 모습이 너무 달라 화가 났었다"고 성폭행 이유를 설명했다.


악명성 활용,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

지난 10월 초에는 약사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20여명의 여성을 유혹, 성폭행한 '약사노바 사건'으로 떠들썩한 적도 있었다. 지난 1월부터 하루 10여시간씩 채팅을 해온 이 약사는 채팅 공간에서 가명을 사용하고 자신을 음악가라고 속이기도 했다.

서울 관악경찰서의 이문국 수사과장은 "최근의 성범죄는 사이버 공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인터넷 공간에서의 만남을 현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이렇듯 현실 부적응, 범죄 및 살인으로까지 발전하는 인터넷 채팅은 사이버 중독증의 한 단면이다. 정보화 시대의 대표적인 역기능으로 알려진 사이버 중독은 인터넷에 빠져 실제 생활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단순히 업무지장을 초래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제 생활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혼동, 언어파괴, 폭력성 및 성충동 유발 등의 문제점을 야기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전부터 심각한 정서적,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거나 마약, 알코올 등 다른 중독 증세가 있는 사람, 시간여유가 많은 비숙련 초보자 등이 인터넷 중독에 쉽게 빠진다. 특히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에 대해 음란물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의 류인균 교수는 "시공간의 제약없이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채팅은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의 장이 될 수 있다"면서도 "사회문제화하고 있는 채팅 중독증세를 치유하기 위한 제도적 교육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양정대 사회부 기자 torch@hk.co.kr

입력시간 2000/11/1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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