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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감독은 세상에서 제일 골치아픈 직업"

[인간탐구] "감독은 세상에서 제일 골치아픈 직업"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감독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뒤 18년동안 그의 이력서엔 딱 한줄뿐이었다. '해태 타이거스 감독'. 그리곤 바위처럼 꿈쩍도 않던 사나이가 드디어 육중한 첫 걸음을 뗐을 땐 얼마나 많은 생각과 신중한 결단이 따랐을까.

최근 삼성 라이온즈 신임감독으로 새 출발한 김응룡(59) 감독. 예상못 한 바는 아니지만 다섯시간이나 새벽길을 달려가 만난 김 감독의 환영사는 정말 너무하다 싶었다. 최소한의 흥분은 커녕 상대를 맥빠지게 할 만큼 여전히 무덤덤을 가장하는 포커페이스의 노장.

"다 똑같은 야군데 소속이 바뀌었다고 크게 달라질게 있나요. 해태에 있을 때든 삼성에 온 지금이든 저는 여전히 야구감독일 뿐 바뀐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야구계 부동의 카리스마, 한국 시리즈 9회 우승, 최다승왕의 기록에 빛나는 최고의 야구명장.

스포츠 분야는 물론 요즘처럼 '자기 판매'에 능한 세태에선 일반 직장생활에서도 보기 드물 한팀 최장수 감독의 기록, 게다가 최근엔 그 특유의 말투로 장외의 인기까지 누리던 참이었다.

반짝스타가 난무하는 요즘 야구를 떼놓고라도 그만큼 우직한 거목을 만나는 일은 어쨌든 매력적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평남 평원에서 출생, 열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온 김 감독은 열두어살까지도 야구 아닌 축구부 선수였다. 그러다 우연히 교내 야구대회에 반대표 선수로 나갔다가 우승. 그것을 계기로 야구선수가 됐다. 축구보다 야구가 좋았던 이유는 이것.


"야구는 예측할 수 없어서 매력적"

"축구엔 거의 변수라는게 없지만 야구엔 늘 예측할 수 없는 운이란 게 있거든요.

예를 들어 축구에선 오늘 상대팀에게 10대0으로 졌다면 내일 다시 경기를 해봐야 그 팀에게 갑자기 이길 수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야구는 오늘 10대0으로 졌어도 내일 경기에선 오히려 우리가 이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승부의 여지가 있는거죠. 그런 매력이 야구엔 있습니다."

교직자였던 아버지는 "운동선수로 밥이나 먹고 살겠느냐"며 야구에 집착하는 아들을 뜯어말렸다. 성품이 호인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반대해도 듣지 않는 아들에게 결국 지고 말았다.

체육시간 뜀틀을 뛰다가 팔을 부러뜨린 뒤에도 전국대회가 다가오자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2주일만에 억지로 깁스를 풀고 기어코 출전해버린 아들이었다. 그렇듯 열성적으로 뛰었던 중학교 야구부 시절, 성적도 좋았다.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꿈은 점점 더 커졌다.

고교 졸업후인 1961년 한국운수 야구단에 입단, 1962년엔 국가대표 선수로도 뛰었다. 아직 국내엔 프로야구가 없던 당시 아마추어 선수이긴 했지만 그 명성과 인기도 만만치않았다. 1963년 일본을 꺾고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뒤엔 부동의 4번 타자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지금껏 이름 앞 수식어로 따라붙는 '코끼리'라는 별명도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듯 공을 넙죽 받아낸다고 해서 어느 해설자가 붙였던 이름.

1973년 통산타율 3할7리의 기록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같은해 한일은행 감독으로 부임,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승운은 몰고다녔다.

실업팀 최연소 감독이면서 나가는 시합마다 승리. 한번 인연을 맺었다 하면 좀처럼 자리를 옮기지 않는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일은행 감독때도 17년간 무쇠처럼 눌러앉아 있었다.

주위에선 '의리'라고도 표현하지만 타고난 그의 천성이기도 하다. 그만한 실력없이는 본인 혼자 의리를 지키고 싶어도 지킬수 없는 것이 냉혹한 스포츠계의 생리임을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한때 야구인생을 접을 뻔도 했다. '있을 만큼 있었다'는 생각에 후배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한일은행 감독직을 그만뒀을 때 남은 것은 은퇴한 선배 대부분이 그랬듯 평범한 은행원으로 사는 일 뿐이었다. 그 기로에서 훌쩍 떠나 미국 대표팀 코치로 돌아다니기를 얼마간.


대구에서 마지막 야구인생 시작

그 고민스런 틈사이에서 마침 한국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스 감독으로 들어서면서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새 승부가 시작됐다. 부임하자마자 첫해 우승을 기록한 것부터 시작해 한국 시리즈 9승을 달성, 해태의 불패신화를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프로야구 최초로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고 2,123경기에 출장해 1,151승 923패 49무, 승률 0.555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최근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 올림픽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걸고 돌아온 감독이었다.

알 수 없는 건 그의 독특한 관리술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익히 소문난 부분. "감독은 선수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지만 사실상 선수에게 그는 편한 감독이 아니다.

잔소리 한번 하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도 없지만 선수들을 제풀에 차렷자세로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무표정과 무뚝뚝함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시합중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땐 혼자 나무방방이로 벽을 세게 내려치거나 덕아웃의 의자를 부수는 등 기행을 벌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 분통 때문이라기보다 행여 선수들의 긴장이 풀어질까 다잡으려는 김 감독의 '계산된 연출'이다.

감독으로서의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한때는 그도 소문난 두주불사의 애주가였지만 여하한 사석에서도 선수들과 술잔 한번 나누지 않았던 냉정한 맹장(猛將). 선수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한 선수 사이에 행여 사소한 편애의 오해라도 생길까 싶어 아예 모두에게 냉담한 척 담담히 거리를 지켰다. 끓는 속은 혼자 삭혔다. 그 바람에 감독생활 20여년에 가슴속이 다 문드러졌다. 선수들에겐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버팀목이 필요했고 김감독은 그것을 주었다.


가족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한 부실한 가장

"사실 감독은 세상에서 제일 골치 아프고 더러운 직업입니다. 승부가 걸린 상황에서 순간순간 결정을 내려야하는 중압감도 크고 일단 시합에서 지면 그 책임이 전부 감독에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저도 속이 다 썩었습니다. 오죽하면 외국선수도 현역으로만 뛰지 감독은 안하려고 합니다. 뭐하러 이 고생을 사서 하겠습니까."

가정적으론 1년에 한달도 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실한 가장이었다. 부친의 부음조차 경기장에서 받았다. 그것도 행여 시합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한 부인의 부탁으로 경기가 다 끝난 뒤에서야 기별을 들었다.

1ㆍ4후퇴 때 내려오면서 북에 두고온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생사 여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살아계신다면 올해 아흔둘.

이산의 아픔조차 혼자 싸안고 있던 그를 보다 못해 주위에서 권유, 1990년에야 비로소 고향방문을 신청했지만 북의 세 여동생과 형님, 누님 등 가족 중 막내동생만 누군가 먼 발치서 보았다는 소식을 희미하게 들었을뿐 어머니와의 재회는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이삼일이면 되돌아갈 줄 알고 아무 생각없이 아버지를 따라 여행삼아 나섰던 평원의 고향집.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던 학교며 떠나기전 살던 집과 동네 골목길은 당장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다 그려낼 만큼 또렷하다.

그런데 정작 가장 애타게 가슴에 묻어온 어머니며 누이, 동생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백지처럼 지워져버렸다. 너무 간절해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좀처럼 속을 내비치지 않는 김 감독이 유일하게 무너지는 것도 TV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현장을 지켜볼 때다.

야구감독 아버지로 둔 죄로 딸들은 어렸을 때부터 다정한 부녀 나들이 한번 다녀보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집안 돌아가는 일엔 남처럼 돼버린 무심한 가장이면서도 화가인 부인과 일찍부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기로 약속, 가족의 이해 덕분에 가정을 지켜왔다.

담담하기로 치면 김 감독의 가족도 못지않은 '과묵파'. 집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볼 뿐 지금까지 단한번의 예외를 빼고는 야구장에 모습 한번 비친 적이 없다.

그 예외란 두 딸의 성화에 못이겨 하는 수 없이 나온 것. 해태팀 18년 동안에도 김 감독 가족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선수나 임원 하나 없었다.


'자물쇠'가슴이지만 정엔 한없이 약해

삼성에 적을 옮긴 후 대구생활을 시작한지 열흘 남짓. 어쩌면 그의 말대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을지 모른다. 평생 야구 하나 밖에 모르고 살아온 그는 지금도 야구 하나 밖에 없다. 가까운 친구도 많지 않다.

지난 20년동안 친해둔 벗조차 모두 합쳐 고작 셋. 그것도 팀 닥터 등 야구 근처의 사람이다. 쉽게 사람을 사귀는 편도 아니지만 한번 마음을 트면 그만큼 정에 약한 사람도 없다. 얼마전 모CF에 등장한 것도 알고보면 마음이 약해서다.

"광고사 사장이 며칠동안 어찌나 끈질기게 쫓아다니는지, 그저 '자판 몇개 두들기면 금새 끝난다'고 하길래 할 수 없이 응낙했습니다. 처음엔 찍다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도중에 나갔다 다시 들어오고., 거 참."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훈련장을 나서면 대개 집으로 직행, TV를 보거나 시합 스트레스를 잊을 수만 있다면 소설이든 무엇이든 잡식으로 책을 읽어치운다.

얼굴이 알려진 터라 시간이 있어도 갈 곳이 별로 없다. 다녀봐야 주로 식당과 사우나 정도. 술을 마실 때도 웬만하면 집에서 맥주 몇캔으로 때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40대부터 매일 오르다시피 한 무등산 대신 이젠 팔공산을 오른다. 등산과 테니스는 그의 오래된 취미. 시합만 아니면 별로 혈압 오를 일도 없다. 평생 사각의 다이아몬드를 지켜온 백전노장이지만 인생 60 가까이 닦은 평상심도 승부 앞에선 예외없이 초조하고 피가 마른다.

보통사람이라면 은퇴할 나이에 오히려 유니폼을 갈아입고 감독 인생 제2막에 선 불멸의 야구인. 바로 문만 열면 쏟아지는 가을볕을 배경삼아 야외에서 사진 한장 찍자고 주문해도 "나는 야구감독입니다"라며 정색을 하고 거부하는, 사소한 타협조차 요령부득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경북 경산의 삼성 전용훈련장에서 이제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투박한 대답이 어쩐지 선언처럼 들린다.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시합에 이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족 하나. '모르쇠'는 청문회장에만 있는게 아니었다. 걸핏하면 '모른다'거나 단답형 대답으로 김을 빼는데 명수인 김 감독.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를 마친 뒤 심란한 걸음으로 나서려는데 지켜보던 삼성 야구단 관계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엉뚱한 것이었다.

"오늘만큼 김 감독님이 말씀을 많이 하시는 건 정말 처음 봤습니다." 대체 그는 야구장 안에서 몇마디나 하고 살까. 그토록 적은 말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변의 웅변가보다 더 한 훈기가 느껴지는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11/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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