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방(房)'이 넘친다

다양한 형태의 '방' 성업

10년 전만 해도 '∼방'으로 끝나는 장소는 '여관방', '복덕방', '자취방' 정도였다.'사람이 거처하기 위해 집안에 만들어진 간'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그나마 충실하던 방이다.그러나 오늘날 온갖 방이 어의확대를 거듭하며 구조나 평수와 무관하게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수용되고 있다.

되레 호텔의 방은 객실로, 복덕방은 공인중개사무소, 자취방은 원룸텔 쯤으로 멋을 부리며 '방'자를 떼버리는 실태와 배치되는 현실이다.

PC방(컴퓨터방ㆍ멀티방ㆍ인터넷방ㆍPC 게임방), 셀프 메이크업방, PC편의방, 녹음방 그리고 방음장치가 돼있는 밀실 안에서 맘껏 괴성을 지르고 멀쩡한 접시를 원하는 만큼 던져 깨뜨릴 수도 있으며 엄청난 폭발음을 들으면서 화면으로 '기관총'을 발사할 수도 있는 스트레스 해소방 등 세포분열하듯 새로운 방이 꼬리를 물고 등장 중이다.

그리고 속성상 충격을 탐할 수 밖에 없는 매스컴은 각종 방들의 향기보다는 악취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각종 퇴폐행위로 개설 취지에서 멀어져

'방문화'의 효시는 노래방이다. 노래방은 사양길로 접어들던 건물의 지하 레스토랑이 영업 아이템을 바꾼 경우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우리 국민 사이에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음식점에도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고 컴퓨터에도, TV에도 노래 반주기가 달라붙기에 이르렀다. '1차 회식, 2차 노래방'은 정해진 놀이 코스였다.

딱히 탓할 만한 구석을 찾기 힘든 건전공간이던 노래방이 언제부터인가 슬슬 술집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음성적으로 술을 팔다보니 자연스레 '주색'은 동색이 돼버렸다. 술 따르는 호스티스들이 꼬여든 것이다. 서울 강남 일대의 노래방 중 상당수는 사실상 단란주점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예 접대부를 상주시키면서 매춘을 알선하는 '노래방'마저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티켓다방 여성이 노래방으로 진출, '티켓 노래방'을 만들기도 한다.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나 노래방을 스와핑 장소로 응용하는 비정상적 남녀도 없지 않다.

노래방의 '방'은 공공적 성격이 강한 방이었다. 하지만 소비자는 그 방에서 '방의 원래 뜻'을 찾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밀폐 공간으로서의 방에만 집착하면서 노래방의 당초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고 만 것이다.

'전화방'은 '폰섹스'와 같은 뜻이 돼버렸다. 물론 개설 취지는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이었다.

부부가 전화방 손님을 위협, 금품을 갈취하고 중ㆍ고 여학생이 30대 남자를 상대로 매춘을 하고 상습적으로 돈을 뜯어내는 등 범죄도 끊이지 않는 곳이 요즘 전화방이다.

익명성이 보장된데다 상대방이 누군인지 모르고 대화하기 때문에 욕설이나 폭언, 음란대화가 당연시되고 있다. 사회문제로까지 떠오른 원조교제의 발상지로 지목되고 있는 곳이 바로 전화방이기도 하다. 여느 매춘업과 달리 일간신문 등에 폰섹스 700전화 광고까지 버젓이 내고 있을 지경이다.


원조교제 발상지, 몰래카메라 등 부작용 많아

전화방의 매춘알선 시스템은 '라디오'식에서 'TV'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름하여 '화상 전화방'. 남녀 목욕탕처럼 출입구가 따로 돼있는 이곳에 들어가 폐쇄회로 TV로 이성을 마주보며 대화하다 의기투합, 방 밖에서 현실상봉을 이루는 불륜남녀가 허다하다. 물론 화상전화방 업주가 고용한 매춘 아르바이트 여성이 대부분이다.

비디오방도 출발은 좋았다. 방해받지 않은채 보고픈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다분히 마니아적 밀실이었다. 그러나 비디오방이 열어놓은 시네마 파라다이스는 오래 가지 못했다.

'비디오방이 여관방'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동시에 '숨어드는 놈 위에 숨어찍는 놈'이 비디오방에 똬리를 튼 것이다.

시계 시침과 분침의 교차점 등 콩알만한 구멍만 있으면 몰래카메라를 설치, 비디오방 내부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애정행위를 고스란히 찍어 내다파는 관음사업자들이 잇따르고 있다.

찜질방은 아프고 저린 구석 많은 중ㆍ장년층을 위한 방이었다. 건강을 다지고 피부노화도 늦출 수 있다는 찜질 자체의 순기능에 싫증을 낸 바람난 남녀들이 역시 이곳마저 퇴폐의 온상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중년부인의 매춘이 발각되고, 화투나 포커 따위의 도박판이 벌어졌다. 남녀가 함께 사우나를 하고 눈을 부칠 수 있다는 찜질방의 특성상 불륜관계가 속출하고 있기도 하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이 없다. 긍정적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방에서 얻을 수 있는 활력소 또한 적지 않다. 아늑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좁은 공간은 나만의, 혹은 내 편 만을 위한 공간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자신만의 공간이 확보된다는 것, 그 안에서 소리를 지르든 춤을 추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매력에다 나와 같은 목적으로 모여든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일체감도 함께 맛볼수 있다. 게다가 그 방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놀이가 있다.

방에서는 혼자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일 수도 있고, 혼자 가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다. 형태야 어쨌든 모두 '놀이'를 위해 방에 모인다.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네만의 오락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 확보란 긍정적 측면도

'나만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 한평 남짓한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 속의 또다른 방으로 외출하는 일도 잦다. 가상세계에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라는 방. 그 안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남을 초대하고 다른 방으로 놀러간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클릭 한번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나홀로 문화'를 즐기는 방법이 컴퓨터망에 깔려 있는 것이다. 열린 공간보다 닫혀있는 구석이 편한 이들의 자기표현 문화가 곧 채팅방 등 사이버상의 방일 수 있다.

작가 이청준은 밀실, 곧 방에서 천국을 찾았다. "조용한 어느 봄날, 집 안의 빈 헛간 구석, 햇볕 가득한 가을철 마당가의 짚더미 뒷켠이나 겨울철 저녁녘의 따뜻한 쇠죽솥 불아궁이 앞 혹은 도드락도드락 눈빗발소리가 문창지를 두드려대는 뒷골방 아랫목 이불 속.."

혼자 있어 아늑하고 달콤한 그런 기분은 그가 좀더 자라서 식구들이 모두 바깥일을 나간 여름날의 기나긴 집보기 때나 들새를 쫓기 위해 드넓은 가을 들녘 논밭길을 혼자 떠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요나 콤플렉스라는 것,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비좁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음이 오히려 마음 편하고 아늑하고 안심스런 심리상태, 그런 맘버릇, 그런 것을 품어 길러 준 자리들.

그것은 아마도 자신만의 삶과 꿈이 숨쉬고 자라 온 곳, 어디보다도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의 드넓은 밀실이 아니었을까.

소설 '광장'에서 최인훈이 남쪽은 개인의 밀실만 있고 광장이 없는 대신, 북쪽은 대중의 광장만 있고 개인의 밀실이 없는 사회라고 했다.

밀실이 없는 광장만의 북쪽 사회는 삭막하고 획일적인 전체주의 체제, 개인적ㆍ개성적 창조의 숨결이 없는 무개성ㆍ무기력ㆍ무창조의 비인간적 통제사회를 가리켜 말함이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그려보인 집단적 공동선(共同善) 지향의 괴물체제 사회도 실은 정보의 완벽한 독점과 감시기능을 통해 개인의 밀실과 사생활을 철저히 말살해버린 살벌한 정보 독재체제의 흉칙스런 산물이었다.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가고픈 욕구의 표출

대량정보와 빠른 유통 속도의 시대, 그로 하여 누구나 서로 자신의 밀실을 나와 함께 섞이고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러므로 때때로 그만의 깊은 밀실을 찾고 싶어하는 바람은 오늘에도 그리 큰 허물이나 부도덕한 일이 아닐 것이다.

어디 잠시 마음을 주저앉히고 지낼 만한 임시밀실이나마 찾아질 수 있을는지.

오직 한사람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경황없이 자기밀실을 빼앗기고 어수선한 광장의 인파 속에 함께 뒤섞여 서성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어디에 아직 그런 개성과 창조적인 삶의 숨결이 깃들 만한 곳은 없는지.

결국 방은 현대인의 자궁 회귀욕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근심걱정 없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됐던 어머니의 뱃속.기억에는 없으나 본능에는 또렷한 완벽한 공간으로 컴백하고픈 욕구의 표출이 바로 끊일줄 모르고 출현하는 새로운 방레曆방일지도 모를 일이다.

신동립 스포츠투데이 생활레저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1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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