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북'이 종이책 시장을 위협한다

디지털 문학시대, '작가→인터넷→독자'로 이어지는 유통구조 대변혁

소설을 종이책으로만 읽던 시대는 지났다. 컴퓨터를 켜면 우리 문학의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올린 신작 소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가을의 시정을 달래줄 시 한 편을 찾아보고 싶을 때는 인터넷 시 전문 사이트로 들어가는 것이 서점에서 시집을 찾는 것보다 빠를 때가 있다.

디지털 시대의 전자책, 이른바 'E북'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이다. 국내 대부분의 유명 인터넷 서점은 네티즌 문학 애호가들을 겨냥해 유명 작가의 신작 게재 코너를 따로 마련하고 있다.


인터넷서점 잇단 소설출간

가장 활발하게 'E문학'을 소개하고 있는 곳은 인터넷 서점 'YES24'(www.yes24.com). YES24는 지난 8월 동인문학상ㆍ현대문학상 수상작가 이순원씨의 '모델'을 첫 출간했다.

기존 출판시장의 '작가-출판사-제본ㆍ인쇄업자-서점-독자'라는 유통구조를 '작가-전자출판사-독자'라는,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유형으로 바꾼 이씨의 전자책 출간은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YES24는 이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중견작가 구효서씨의 '정별'(9월), 촉망받는 젊은 작가 백민석씨의 소설 '러셔'(RUSHER)(10월)를 잇달아 출판했다.

작품의 층위도 다양하다. 이씨와 구씨의 작품이 비교적 전통적 소설에 충실한 내용과 형식이라면 신세대 작가로 불리는 백씨의 경우 내용과 형식부터가 디지털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러셔'는 마치 잘 만들어진 한편의 SF영화 같은 소설이다.

지구를 대기오염의 환경재앙에 휩싸이게 만든 '에코 데미지'가 발생한 AD28년의 가상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와 게임, 만화, 음악이 주는 기호와 이미지들이 문학과 크로스오버되어 단순한 오락소설도 고급한 예술소설도 아닌, 마치 한편의 SF영화 같다는 평을 받았다.

YES24는 이들 외에도 11월중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하성란ㆍ전경린씨와 이승우씨, 12월에는 김인숙ㆍ최수철씨, 내년 1월에는 성석제ㆍ윤후명씨, 내년 2월에는 윤대녕ㆍ임철우ㆍ박상우씨의 신작을 잇달아 게재할 예정이다.

이만 하면 현재 한국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망라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한 '마이클럽닷컴'(www.kr.miclub.com)도 일찍부터 김영하씨의 '아랑 내 사랑' 등 작품을 연재해 독자의 호응을 받고 있다.

젊은 작가들의 이같이 활발한 디지털 신작 발표에 이어 E북 열기에 불을 댕긴 이는 이문열씨다. 그는 10월24일 신작 중편소설 '하늘길'을 인터넷서점 '에버북닷컴'(www.everbook.com)에 발표했다.

24일 오전 9시 서비스 개시 3시간만에 방문자수가 1,200명을 넘어섰고 3,000원을 내고 전자책을 다운로드받은 독자도 3시간만에 30명을 넘어섰다.


이문열씨 '하늘길' 네티즌 독자들에 큰 반향

에버북닷컴은 "서비스 초기 시간당 10명 정도가 구매하는 것은 다른 전자책에 비하면 두드러진 성과"라고 평가했다. "아날로그 작가인 이씨가 처음 E북에 도전한 것이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길'은 가난과 고통으로 인한 생존의 문제로 하늘길을 찾아나선 한 젊은이의 구도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우리 전래동화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씨는 "경험이 생소한 형태의 출판이라 주제와 소재를 고르는데 적잖이 고심했다" 면서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는 폭넓은 독자를 위해 동화 양식을 취했다" 고 말했다.

이씨의 이 작품은 200자 원고지 250장 분량의 중편으로는 파격적으로 계약금 1,000만원에 인세가 33%여서 발표단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온라인 소설이 높은 부가가치로 작가들로부터도 환영받고 있다면, 시는 그에 비해 아직 상업화는 덜 됐지만 그래도 네티즌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사이트들이 많이 생겨났다. 지난 9월1일 오픈한 '포엠토피아'(www.poemtopia.co.kr)가 대표적이다.

포엠토피아는 한국 현대시의 체계적 데이터베이스화와 함께 일반 독자들이 친근하게 시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 다양한 내용이 돋보인다.

'즐거운 시와 시인 사회'를 모토로 한 포엠토피아에서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리 현대시의 체계적 검색 기능. 시인별, 시어별로 사전식 검색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제, 소재, 키워드, 계절별로 분류 검색할 수도 있다.


근·현대시 100만편 인터넷에 올릴 예정

예를 들어 가을에 어울리는 낙엽과 관련된 시를 찾고 싶다고 하자. 검색 기능에서 '가을&낙엽'을 입력하면 안도현씨의 '가을 엽서'부터 김용호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까지 관련 시의 목록이 좍 나타난다.

현재 약 1만 편의 시를 올려놓았으며 2002년까지 10만 편, 2010년까지는 우리 근ㆍ현대시의 거의 전부인 100만 편 이상을 축적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요즘 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깰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획물도 알차다. 고은 시인의 명시 감상 코너를 비롯해 이윤학 장석남씨 등의 '젊은 시인들과 함께 읽는 나의 시', 새로 나온 시집을 촌철살인으로 평하는 50자 신간 시집 평 코너도 마련됐다.

'화제시 문제작'에서는 '우리 시의 포르노그라피를 진단한다'는 주제로 마광수 시인 등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 시와 그림이 있는 공간 '포엠 아틀리에'와 '명사들의 애송시'도 올려놓았고 각종 문학상 수상시 감상 코너도 따로 있다. 일반 네티즌이 자신의 작품을 게재해 평도 받고, 중ㆍ고교생 및 일반인이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한다.

그간 개별 시인이나 단체가 운영하는 시 관련 사이트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종합적ㆍ체계적 기능을 가진 포털 사이트가 생긴 것은 처음이다.

주간 정한용 시인은 "네티즌이 시를 읽고 건전한 문화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문화전문 종합 포털 사이트로 발전시켜 2002년에는 인터넷 방송국도 개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온라인 문학에 비판적 목소리도

이처럼 문학을 디지털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E북 시장이 종이책 시장을 대체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에 대해서 그렇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기호씨가 대표적인 경우. 그는 "E북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한씨는 "종이책이냐 E북이냐,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 죽기살기의 양자택일을 넘어 상생(相生)을 모색해야 한다.

디지털은 디지털에 맞는 콘텐츠를, 아날로그는 새로운 아날로그로 탈바꿈하는 것이지 전자책이 일시에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아날로그의 콘텐츠를 디지털로 장소이동만 하면 된다는 생각 역시 디지털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E북이 종이책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네티즌 문학독자의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온라인 문학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종오 문화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15 21:02


하종오 문화부 joh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