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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망대] 원칙이 실종된 정책

미국의 포춘지 기자 저스틴 마틴은 최근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삶을 다룬 '돈의 막후 조정자'(Man Behind Money)를 펴내며 "만약 그린스펀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린스펀을 발명해야 했을 것"이라고 극도의 찬사를 보냈다.

전무후무한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 국면을 가져온, 이른바 신경제의 기반에는 '경제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린스펀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자리잡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카리스마의 핵심은 정권보다는 항상 시장을 중시하는 그의 시선이다.


풀리지 않는 자금경색, 해외여건도 불투명

기업구조조정의 핵인 현대건설 문제까지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 매듭되고 금융구조조정도 큰 틀을 잡아 공적자금 동의안 처리만 남겨두고 있지만 시장에 드리운 불확실성의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정부는 "금년 말까지 예정된 구조조정 일정을 마무리하면 하강국면에 돌입한 경기가 내년 3월쯤 반등할 것"이라며 자금시장 안정책의 강도를 높이고 있으나 은행예금과 국공채 등 무위험 자산으로만 몰리는 돈의 흐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동아건설 및 대우차의 부도와 법정관리 후유증,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는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 노동계의 총파업 투쟁과 여야의 극한대치 등 정치ㆍ사회적 불안, 갈수록 늘어나는 재정적자, 국가 경제력을 넘는 과도한 사회보장 지출,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위축으로 인해 시장 애널리스트들의 분석과 전망은 비관 일색이다.

특히 대우차가 이달 중 결제할 물대어음이 3,600억원에 달해 협력업체들의 자금난은 25일을 전후해 한계에 달하고 공적자금 동의안 처리 지연으로 금융 구조조정 일정도 차질을 빚게됐다.

해외 여건도 극히 불투명하다. 금주 중 미국에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제유가가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고, 반도체 가격의 급락세도 멈출 줄을 모른다.

첨단기술업종의 수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나스닥은 1년만에 3,000선을 위협받고 있고, 만신창이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우려로 투자자들은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유로의 급락으로 유럽시장에서의 한국상품 경쟁력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른바 대선(election) 수익성(earnings) 국제유가(energy) 유로(euro)의 '4e 악재'가 밖에서부터 우리 경제를 압박하는 형국이다.

뭉치돈의 달러 사재기도 심상치 않다. 해외투자은행이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는 뮤추얼펀드 수탁고가 급증하면서 달러 순유출은 9월 기준 1억8,360억 달러에 달했다. 8월까지는 환매가 많아 달러 순유입을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조짐이 좋지 않다.

최근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140원선을 넘어선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이번 주에도 역외세력의 달러매수와 정유사 등 수입업체의 결제수요가 몰려 달러당 1,150원선까지 육박할 것으로 점치기도 한다.


한국판 그린스펀은 없나?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위험 요인 자체가 아니다.

선거를 의식해서, 당장 눈앞의 주가를 생각해서, 자리에 연연해서, 이런저런 인연에 얽매여서, 당면한 문제와의 정면대결을 회피하거나 미봉책으로 덮으려는 정책담당자들의 태도가 보다 근본적인 위기의 요인이다.

명망있고 실력을 검증받았다는 사람도 말로는 항상 원칙을 앞세우지만 원칙의 내용이 뭔지는 뚜렷히 밝히지 않는다.

오늘은 재벌의 상호지원을 단절해 선단 경영과 황제적 오너십을 척결하는게 원칙이었다가, 내일은 시장의 안정을 위해 편법적인 계열사지원을 종용하는게 원칙이 된다.

다시한번 그린스펀으로 돌아가면, 그는 1994년 초 미국 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자 1년만에 연방기금 금리를 3%에서 6%로 두배나 올렸다.

그 결과 다우지수가 폭락하고 클린턴은 펄펄 뛰었지만 그의 결정이 옳았음은 곧 드러났다. 클린턴은 1996년 초 공화당원인 그를 연임했고 그해 9월 미국 증시 폭락, 동남아 외환위기, 유가 급락에 따른 산유국의 재정파탄 등 세계 경제가 공황직전에 내몰리자 그는 금리를 3차례나 인하하는 결단으로 일거에 문제를 해결했다.

입과 금리라는 수단만 갖고 세계 투자자들을 웃고 울게하는 그린스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국회가 공적자금만 원활하게 조성해주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얘기하는 관리들을 접하고, 거리에 넘쳐나는 노동가를 듣다보면 '뉴밀레니엄 영웅 대망론'의 헛된 꿈을 꾸게 된다.

이유식 경제부 차장 yslee@hk.co.kr

입력시간 2000/11/2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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