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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소추안 표결 무산, 정국경색 장기화 조짐

박순용 검찰총장과 신승남 대검차장에 대한 탄핵소추안 처리과정에서 정치권은 또한번의 후진성을 보여줬다.

이른바 '상생'(相生)이 아닌 '살상'(殺傷)의 정치가 21세기 한국의 정치에서 여전히 주요 코드로 작동하고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지난 11월17일 자정, 탄핵안이 사실상 폐기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잔뜩 상처입은 패자만이 널부러져 있었다.

우선 민주당은 집권당의 위상이 더욱 추락했다. "탄핵안이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치공세"라는 논리를 들고나왔지만 여론은 냉담에 가까웠다. 그리고 표결도 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드러냈다.

지도부는 15일의 탄핵안 보고 당시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것으로 예상치 않았다. 표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자체 의석 119석에 자민련 17석, 무소속 4석을 합쳐 재적의원 273명에서 140석을 확보, 의결 정족수 137석을 무산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비 한나라 연대' 붕괴, 갈라진 자민련

하지만 당일 오후 들어 지도부는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계산이 다르게 나왔다. 자민련에서 4명 이상의 의원이 표결을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부랴부랴 당론을 탄핵안 상정 불가로 못박았다.

결국 탄핵안은 자동폐기시켰지만 이는 더이상 민주당이 국무총리 인준안 등 16대 국회에서 여러차례 과시했던 '비(非)한나라 연대'가 물 건너가고 있음을 상징했다.

자민련의 타격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대 피해자는 김종필 명예총재로서 그의 '영'(令)이 무너졌다. JP는 민주당의 요청을 받고 소속 의원의 집단퇴장을 종용했지만 17명 중 6명이 이를 무시하고 자유투표를 부르짖으며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자민련 총무실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민주당 의원은 허탈한 표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민주당의 K의원은 "그마나 그러저럭 유지되고 있던 두 당의 공조에 깊은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표결을 주도했던 강창희 의원과 이완구 의원이 총무실로 돌아와 "이제 당내 이견을 씻고 잘 하자"고 말했지만 그를 쳐다보던 동료의원의 눈빛은 싸늘했다.

이만섭 국회의장도 날개가 꺽였다. 이 의장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탄핵안을 상정하지 않았고 한나라당은 사퇴권고안을 제출했다. 그의 여야 조정력은 현재 바닥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상황은 어떤가. '상처뿐인 영광'이지만 일단 외상이 작다. 무엇보다도 탄핵안으로 여론 주도에 성공했다. 한 고위 당직자는 "413 총선 직후 부정선거의혹을 집중제기했지만 급진전되던 남북관계로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탄핵안으로 많은 국민이 우리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대선을 불과 2년여 앞둔 시점에서 권력의 중추세력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줬다. 검찰이 수 틀리게 나오면 언제든지 같은 액션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실리가 별로 없다. 표결에 들어갈 경우 이탈표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던게 사실이다.

또 검찰에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의원이 발의에 앞장 섰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벌써부터 비주류를 중심으로 '국회를 극한 대결로 몰고가 얻은게 무엇이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 명분 앞세운 등원 가능성

한나라당이 탄핵안 자동 폐기에 반발하고 있지만 여야 대치가 장기간 끌 것 같지는 않다. 야당에게는 한빛사건 국정조사라는 '호재'가 남아있고 여당은 공적자금과 내년도 예산안을 제때 처리해야 한다.

민주당이 적극적인 야당 달래기에 나서고 야당은 적당한 명문을 얻은 뒤 국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 시점이 문제일 뿐 수순은 과거에도 늘 그랬다. 초점은 큰 틀에서의 움직임이다.

민주당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다. 외형상 "국가 공권력의 최후 보루를 지켜냈다"(정균환 원내총무)고 자축했고 청와대도 "모양새는 구겼지만 검찰권 공백사태를 막았다"며 위안을 삼고 있다. 하지만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 원내 2당으로 향후 정국 운영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 직면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소수여당의 한계를 다시한번 절감한다"고 토로했고 동교동계 인사는 "언제까지 몸으로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권력 누수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4년차를 앞두고 약체 집권세력의 실체가 다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권 핵심부에서는 긴장감이 감돈다.

한 당직자는 "자신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질 경우 사정기관이 정권의 말을 제대로 듣겠느냐"며 속에 있는 말을 했다.


권력누수현상 우려, 득실계산에 분주

당장 국회를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도 난제다. 의석수 부족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필요하고 대안으로 자민련과의 공조를 확고하게 다지든지 아니면 의석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현실적으로 전자쪽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게 주류다.

이 대목은 20석도 되지 않는 당을 제대로 단도리하지 못한 JP의 자괴감과 맞물려 있다. JP 입장에서 가급적 빨리 당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 자신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수하들은 물론 주변에 널리 과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에 손짓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는 DJP 공조 복원에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는게 민주당측의 기대다.

하지만 문제는 JP가 이번 상처를 말끔히 씻고 당을 일사불란하게 직할 통치 체제로 관할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한나라당은 이번 사태를 이회창 총재의 대권전략을 점검하는 계기로 보는 분위기다. 지난 1997년과 달리 야당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상황에서, 앞으로 유리한 대권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힘 있는 야당 총재와 야당의 위상을 연속성있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전략으로 압축된다.

권력기관에는 함부로 행동할 경우 다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도 확실하게 보냈다. 이 효과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너무 앞서 가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계속해 여권을 궁지로 몰고 갈 경우 자칫 물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온건파로 분류되고 있는 한 부총재는 "그렇치 않아도 이 총재와 당은 포용력이 부족하고 여당의 발목만 잡는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서 "이게 고착화되고 여권과 대립각만 세울 경우 DJ 정권의 대안이 아닌, 일방적인 비판세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한민수 국민일보 정치부 기자 mshan@kmib.co.kr

입력시간 2000/11/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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