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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좌담회]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사

한국일보사와 요미우리(讀賣)신문사 공동주최 '한일 교류좌담회' 세번째 행사가 11월 7~9일 일본 나라(奈良)에서 열렸다.

전체 주제가 '한일 이해에의 길'인 행사의 이번 소주제는 '한일 문화의 원류와 교류-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였다.

참석자들은 좌담회 전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와 나라 일대의 유적을 둘러보기도 했다. 좌담회는 8일에 5시간동안 열렸다.

<참석자>

한국측=李御寧(좌장ㆍ새천년준비위원장), 金鉉球(고려대 사범대학장ㆍ일본고대사), 申敬澈(부산대 고고학과장)

일본측=우메하라 다케시(梅原 猛ㆍ좌장),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ㆍ교토대 명예교수), 이노쿠마 가네가쓰(猪熊兼勝 ㆍ교토 다치바나여대 교수)

<진행>

한국 임철순(任喆淳ㆍ한국일보 편집국 국차장)

일본 기시모토 고이치(岸本弘一ㆍ요미우리 편집국 국차장)

일시ㆍ장소=2000년 11월8일(수) 나라현 카시하라(?原)로얄 호텔


아스카시대의 역사적 특성

▦우메하라=일본에서는 '아스카(飛鳥)ㆍ 나라(奈良)시대'라고 항상 세트로 말하는데, 율령체제가 대체적으로 아스카시대에 구축돼 나라시대에 완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를 제2의 개국시기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쇼토쿠(聖德) 태자입니다. 그는 드물게 국제적 정치가이면서도 사상가 철학가였습니다.

여러 문화를 중국에서 수입했고 실질적인 헌법을 만들고, 불교를 중심으로 했지만 유교 도교도 함유된 삼교일치(三敎一致)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여러 사상을 통일함으로써 화합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삼은 사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원리는 일본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됐습니다.

▦이어령=아스카문화는 일본문화의 시초요, 한국에서 보면 가장 일본과 밀접했던, 거의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으로서 오가는 가장 가까웠던 시절이므로 양국 문화교류의 원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스카는 명일향(明日香), 내일의 향이라고 써놓고 왜 또 도부도리, 비조(飛鳥)라고 쓰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부도리에서 도부는 한국어로 '날다'는 뜻이고 새라는 것은 나는 새도 있지만, 한국말로 날이 새다, 일본어로 아케루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날새는 내일, 명일이 됩니다.

향은 일본말로 가오리인데 한국말로 가사블,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비조를 훈으로 읽으면 내일의 고을, 내일의 땅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곳은 내일의 땅, 미래의 땅, 새로운 땅이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꿈을 안고 내일의 땅을 만든 곳이 아스카이며, 이 내일의 땅은 영원히 내일의 땅입니다.

▦우에다=아스카시대가 일본의 제2의 개국이며.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시기라는 말에 동감입니다. 일본 역사학에서는 스이코(推古) 천황시대 6세기 후반, 7세기 전반의 약 100년간을 아스카시대라고 부릅니다. 7세기 후반을 하쿠호(白鳳)의 시대, 8세기를 나라시대, 덴표(天平)시대라고 부릅니다만, 넓은 의미에서 하쿠호시대를 포함한 아스카시대라고 말할 경우도 있습니다.

아스카시대에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삼국이었습니다.

아스카지(飛鳥寺)의 가람 배치는 중간에 탑이 있고 금당이 세 개가 있는 1탑 3금당 양식입니다. 고구려에 있는 양식입니다. 아스카지를 생각해도 한반도 삼국과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이코 10년 서기 602년 백제로부터 관륵(觀勒)이라는 스님이 불교 뿐 아니라 천문지리서, 도교, 법술서 등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람도 아스카지에 산 적이 있습니다. 아스카의 역사 문화를 말할 때 페르시아나 중국, 인도도 중요하지만 가장 깊은 관계는 백제,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입니다.

▦김현구=아스카의 국제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세기 때 이미 대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옵니다. 10명중 8~9명이 대륙에서 온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카마츠즈카(高松塚)에 나오는 여인들의 의복이 고구려 쌍용총(雙踊塚)에 나오는 의복과 일치합니다.

14~15세기에 한국에서 왜구라고 부른 사람들이 고대에는 해상(海商)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국적을 초월한 사람들로 볼 수 있는데 아스카에 와 살았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스카지의 모양은 고구려에서 오고, 짓는 기술자들은 백제에서 오고, 백제와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여기서 묵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스카야 말로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한일교류를 생각할 때 아스카를 원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노쿠마=유랴쿠(雄略) 천황 때인 서기475년엔 백제에서 아스카로 두 개의 큰 집단이 옵니다. 와카야마(和歌山)현의 기노카와(紀川)를 건너서 왔을 겁니다. 기노카와에서 여기 들어올 때까지 한반도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야마토(大和)쪽에 가까운 것이 이마키(今來)라는 곳입니다. 도래인이 '방금 왔다'는 뜻에서 그 지명이 됐을 거예요. 왜 아스카땅에 도읍이 생겼는가 생각하면 공주 부여의 궁전은 아스카 도읍을 고르듯 지리적으로 구릉을 요새로 삼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제를 본받아 그런 곳에 도읍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발굴된 것과 여러가지 사라져 가는 옛 문헌을 맞춰봤을 때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이코 천황 즉위식때 문무백관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다고 돼 있는데, 오진(應神) 천황 때 진모진(眞毛津)이라는 백제의 여자제봉사가 처음 옷을 전해준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백제의상을 잘 모르지만 다카마츠고분 벽화에 나오는 치마의 오방색이 한국의 색동한복과 너무 같아 발굴얘기를 하면 재미난 화제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일본

▦신경철=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일본계 유물을 보면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도 일정한 사람들이 건너와 체재한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김해 대성동(大成洞)고분군에서는 일본의 파형동기(巴形銅器)가 나옵니다.

야마토 중심으로 4세기 때 일본지배자의 상징적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의 하지키(土師器)계 토기들도 부산, 김해 중심으로 경남 해안지역에서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유물은 아닙니다. 양국 학계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4세기 전반까지 일본계 토기는 일본에서 직접 제작한 것들이 들어오다가 4세기 중엽 후반대가 되면 일본계 토기가 가야땅에서 만들어집니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도래인은 5세기 중엽 이후 등장하지만 일본쪽 한반도계 고고학자료를 보면 5세기 초부터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진 천황도 백제계라는 말이 있지만 이 시기에 동시에 나오는 유물은 가야유물입니다. 나중의 도래인은 백제인이지만, 그 이전은 가야를 중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백제와의 유기적 관계는 5세기 말 이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에다=왜인이 한반도 남부에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유적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을 할 때 현재의 국가나 국경의 개념으로 고대를 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야요이 후기에 가야와의 교류가 있었고, 철문화가 일본해쪽 일본에도 들어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문화를 물건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문물론은 문화가 아닙니다.

사람이 빠진 것입니다. 도래 4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1단계는 야요이, 제2단계는 5세기 전후, 제3 단계는 5세기 후반, 제 4단계 7세기 중엽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5세기쯤 많은 도래인이 왔고, 야요이 전기에는 금속기를 가져왔고 당연히 도래인들이 왔을 것입니다.

도래시기를 특정한 시기에 한정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가야인, 여기서부터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 발상이 아닙니다.

▦이노쿠마=2,000년 전부터 한반도는 삼국시대라 불리고 있었으나 10수년 전부터 사국시대가 적절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소위 일본의 후기 고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가야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

그런데 문헌에는 삼국유사에 가야문화에 대한 것이 조금밖에 없어 증명하기 어려운 단계입니다. 백제라는 것을 너무 강조한 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도 가야문화와 백제문화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우에다=재작년 아스카무라 남쪽에서 아주 훌륭한 연못이 발굴됐습니다. 사이메이 천황때 만들어진 것입니다만 문무왕 14년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유적과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서양식 욕조를 이단으로 겹친 듯한 물넣는 구조로 돼 있는데 안압지는 문무왕이 한반도 통일을 기념해 만든 것입니다. 아스카무라의 연못은 덴무(天武) 14년에 덴무천황이 만들었다는 학킨고엔(白錦後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유적의 동쪽에 사카후네이시(酒船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신라와 공통점이 있다고 전부터 생각했는데 1992년께 돌담이 나왔습니다.

신라의 영향도 있지만 백제의 여러 곳을 가보면 돌을 가공해 물을 흐르게 하는 시설이 많이 있습니다. 신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일본쪽이 더 오래됐습니다만 백제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현구=아스카와 한국의 백제 신라 가야 간에는 다양한 교류가 있었지만 저는 역시 백제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적어도 6세기 단계가 되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정치적 차원의 중요한 창구는 백제였습니다.

백제는 372년 평양성을 공격,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입니다. 그 해에 백제는 중국의 동진과 교류를 합니다. 369년엔 신라와 교류를 합니다.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 주변과 관계를 맺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신라 왜와 관계를 맺으려면 가야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됐다고 봅니다.

300년대 후반에는 야마토조정과 백제의 관계가 아주 긴밀해집니다. 이런 것이 백제와 가야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다음>

입력시간 2000/11/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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