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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34)] 적군파(赤軍派)①

11월8일 니혼세키군(日本赤軍)의 최고 간부인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ㆍ55)가 오사카(大阪) 다카쓰키(高槻)시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1974년의 헤이그 사건으로 국제 수배된지 26년만이었다.

도쿄(東京)경시청으로 이송되던 도중 보도진의 카메라에 잡힌 그의 모습은 한때 세계를 떨게 했던 테러집단의 카리스마적 '여제'(女帝)나 여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부나, 약간은 고생을 한 동네 중년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의 검거를 미국 대통령 선거로 정신이 없던 가운데서도 일본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국외 잠복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그가 일본에서 검거된 놀라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의 검거가 한 시대의 종막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말은 옛날 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노동계급의 전위 정당을 자임했던 일본 공산당조차 11월20~24일의 당대회에서 규약을 개정,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탈바꿈을 모색하려는 상황이다.

일부 대학에 '가쿠마루'(革マル)를 비롯한 과격파 동아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명맥을 잇는 것이 최대 과제일 정도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일제 군군주의의 혹독한 탄압에 시달린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은 패전후 최대의 탄압수단이던 치안유지법의 철폐로 모처럼 개화기를 맞았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에 따른 연합군사령부(GHQ)의 정책 변화로 이내 비합법 공간에 갖혀야 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은 모처럼 마련된 탈출구였다.

그해 6월4일 560만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전국을 흔든 데 이어 15일에는 580만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이뤄졌다.

더욱이 같은 날 학생시위대가 국회를 점거, 경찰이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도쿄대 학생이던 시라카바 미치코(樺美智子)가 숨졌다. 때마침 구미를 휩쓸던 신좌파(New Left) 운동의 격랑 속에서 일본의 대학가에는 학생운동의 열풍이 몰아쳤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은 일본 공산당 좌파의 영향 하에 있던 여러 학생 동맹, 일본 공산당과는 간접적 관계에 머물렀던 공산주의자동맹(Bund) 산하 젠가쿠렌(全學連) 계열의 동맹ㆍ연맹, 일본 사회당(현 사민당)의 영향 하에 있던 사회주의 청년동맹의 각종 단체 등이었다.

이들의 조직과 노선은 극히 다양해 당파간 노선 싸움과 무력 투쟁이 그치지 않으면서 차츰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다.

이같은 당파성은 1965년 이후 등록금 인상, 교원 임용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국 대학의 교내 투쟁을 주도한 전학공투회의(全共鬪)에 의해 극복되는 듯 했다.

당파를 초월한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각 대학에 잇달아 발족한 전공투에는 기존의 각종 조직원 뿐만 아니라 일반 대학생이 대거 참여했다. 한창 때인 1968년 말 전공투는 전국 116개 대학에서 교내 분쟁을 일으켰고 15개 대학을 점거했다.

특히 1968년 7월부터 전공투에 점거된 도쿄대학의 야스다(安田) 강당은 전공투 운동의 상징으로 통했다. 1969년 1월18일 저녁에 8,500명의 경찰기동대가 동원된 공방전은 다음날 야스다 강당이 불타면서 막을 내렸다.

전공투는 이해 9월 전국전공투연합을 발족, 재기를 시도했으나 당파간의 노선 투쟁이 중시되는 상황이 학생 다수의 외면을 불러 그 이름이 사라졌다.

대학내의 대중적 참여를 가능하게 했던 전공투 운동의 붕괴는 학생운동의 소수ㆍ과격화를 불렀다.

치열한 노선 싸움과 내부 충돌, 존재 과시를 위한 경찰서 등 공공 시설의 습격ㆍ방화가 잇따른 가운데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共産同赤軍派)의 무장투쟁 노선이 부각됐다.

1967년 공산주의자동맹 전국대회에서 당시 교토(京都)대 학생이던 정치국원 시오미 다카야(鹽見孝也)가 '국제주의와 조직된 폭력'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통해 "혁명은 전투적 대중운동이 아니라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고 주장, 신좌익 각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듬해의 공산동 전국대회는 시오미의 논문에 동조하는 간사이(關西)파와 반대하는 간토(關東)파의 동서대립으로 격론이 빚어졌고 결국 간사이파는 1969년 '공산동 적군파'로 독립했다. 의장은 시오미가 맡았고 메이지(明治)대 학생 시게노부가 중앙위원겸 조직부국장으로 떠올랐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2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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