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기백바둑'으로 대역전 시동

이미 조치훈은 맘을 비웠다. 맘을 비운 것이 어찌 또 한두번인가. 작년도 그랬고 재작년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조치훈이 성숙했다는 걸 새삼 느낀다. 1986년 휠체어 대국을 할 즈음을 생각해 보라. 고바야시에게는, 아니 누구에게도 지지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찼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 남은 본인방 타이틀을, 더욱이 이미 3연패를 당한 만큼 몰락 직전의 위기임에도 그는 차라리 편안해한다. 노루 꼬리만큼 남은 자신의 시대가 이렇게 저물어감에도 초연할 수 있는 건 성숙이 아니고 무엇이랴.

제4국. 조치훈은 흑을 들고 무려 4연성 포석을 선보인다. 고바야시도 조치훈의 기백처럼 덩달아 양 화점을 놓기는 했으나 얼마 못가 본연의 임무(?)인 실리바둑으로 전환한다.

조치훈은 다케미야의 우주류에 버금가는 세력바둑을 구사한다. 이렇게 두고 싶은 것이다. 이유가 어디 있나. 이미 기울어진 시리즈라면 자신이 평소 두고 싶은 대로 한번 두어보는 것이다.

역시 고바야시는 파고든다. 바둑은 일찍부터 고바야시의 '지하철 바둑'과 조치훈의 대세력 작전이 호응하여 언제나 그렇듯 대세력에 들어온 상대를 어떻게 요리하느냐 하는 대마잡기 바둑으로 굳어진다.

중반, 조치훈은 빨리 승부를 건다. 보통은 대마를 잡는 척 하다 놓아주며 계가바둑으로 흘러가는 것이 고수바둑의 양태지만 조치훈은 아예 잡자고 덤벼든다. 물론 고바야시가 잡힐 위인도 아니다. 그렇게 쫓고 쫓기길 수차례.

"아니, 어디가 문제지?"(고바야시)

"글쎄, 백도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조치훈)

희한한 건 피차간 뚜렷한 악수나 완착이 없었음에도 바둑은 조치훈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겨우 한 판을 건지면서도 굳이 왜 이겼는지 승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조치훈은 2차, 3차를 거쳐 고래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이제 한 판을 이겼으니 조치훈은 체면치레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그가 역전을 이룰 거라는 망상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일본저널은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기는 한다. 언제나 저널이란 자극성 있는 기사가 원천이거늘 조치훈이 또다시 대역전의 시동을 걸었다며 약간의 운을 떼고 있을 뿐이었다.

한가지, 조치훈은 7번기 시리즈를 하면 할수록 내용이 충실해진다는 건 좋은 지적이었다.

게다가 고바야시가 스스로 지적하듯 조치훈은 위기에 몰리면 30%의 힘이 더 생긴다는 점은 특기사항이다. "조선생은 담력이 좋아 7번기에서 3번을 져도 다음 한 판만 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한 판'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강인함을 키우는 일이 소년시절부터 다른 기사보다 많았던 것도, 조선생이 몰리면 강해지는 원천임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고바야시) 한마디로 고바야시만은 조치훈에게 아직 이겼다고 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것이 공인으로서 그냥 해보는 말인 지 아닌지는 고바야시만 알고 있을 뿐이다.

5국도 조치훈이 앞서간다. 백을 든 조치훈의 착수에 문제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감탄을 자아내는 묘수도 간혹 등장하여 앞선 4국처럼 고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상태가 마지막까지 이어질 것인가. 현장 해설자인 레드먼드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고바야시 선생은 나쁘지 않다고 보고있지만 백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백이 최소한 나빠진 장면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치훈은 4, 5국을 연승, 완승을 거두며 시리즈를 2:3으로 만들어놓았다. 몹시 지쳐있지만 두 판을 따낸 건 즐거운 일이다.


<뉴스와 화제>


ㆍ유창혁, 삼성화재배 우승도전

유창혁이 부진을 씻고 세계정상에 우뚝 설 것인가. 세계최대기전인 제5회 삼성화재배 결승 제1국이 11월 23일 강릉에서 막을 올린다.

삼성화재배 결승은 유창혁과 일본의 신예 야마다 기미오가 올라 있는 상태. 야마다는 현재 일본내에서는 무관이지만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 뒷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 2년간 극심한 부진에 빠져있는 유창혁이 과연 세계정상 컴백으로 잇단 부진에서 탈피할 지 주목거리다.


ㆍ이세돌 LG배 4강진출

'불패소년' 이세돌이 제5회 LG배 8강전에서 강적 루이나이웨이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현재 국내에서 배달왕전, 천원전 등 2개 기전에서 동시에 타이틀에 도전하는 이세돌은 이로써 세계대회에서도 당당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올해 막바지 바둑가의 최대 복병으로 떠올랐다. 4강전 상대는 중국의 저우허양이다.

여기서 승리할 경우 이창호-왕리청의 승자와 타이틀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이게 된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11/2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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