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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으로 막내린 '가토 반란'

모리내각 불신임안 부결, 자민당 파벌정치 벽 실감

일본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 내각의 불신임안이 중의원 본회의에 상정된 11월20일 밤 자민당의 가토ㆍ야마사키파 의원들은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인근의 호텔에 모였다.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간사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커다란 희생을 겪어서는 안된다. 분하게도 숫적으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 명예롭게 후퇴해 힘을 키우자."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정조회장은 "본회의 찬성투표를 자중하기로 했다"며 "가토씨는 21세기의 지도자이니 정치생명을 잃으면 우리의 손실"이라고 덧붙였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가토 전 간사장은 "나라도 야마사키씨와 함께 본회의장에 가서 찬성투표를 하고 오겠다"고 일어섰다.

10여명의 의원이 일제히 달려나와 "가지말라"며 가토, 야마사키 두 사람을 에워쌌다. 입술을 꽉 깨문 가토 전 간사장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집안단속 소홀이 패인

민주당 등 야4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의 부결은 이 순간에 결정됐다. 반대토론에 나선 보수당의 마쓰나미 겐시로(松浪健四郞) 의원이 야당의석에 물을 끼얹은 소동을 벌인 끝에 21일 새벽에 행해진 표결에서 불신임안은 찬성 190, 반대 237표로 부결됐다.

가토파 45명 중 24명, 야마사키파 19명 중 2명이 찬성표를 던졌으니 본회의에 불참한 양파의 43명이 찬성표를 던졌어도 4표차의 부결이었다.

집안단속에 소홀했던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9일 밤 가토 전 간사장이 전화를 걸어 "비책(秘策)을 흘려버렸다"고 밝혔을 때 야마사키 전 정조회장은 "아뿔싸, 일주일 빨랐다"고 곤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21세기의 첫 내각을 직접 짜고 싶어했던 가토 전 간사장의 계산은 정확했다. 모리 총리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당내 주류파 내부에서도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를 모리 체제로 치르기는 어렵다는 회의가 무성했다.

그러나 비주류파가 당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4당의 내각 불신임안 제출은 절호의 기회였다. 야당 190표에 50표만 보태면 간단히 과반수인 240표를 넘을 수 있었다. 주류파 내부의 반란표도 있을 수 있고 양파의 64표만으로도 충분했다.

불신임안 통과후의 총리지명 선거나 중의원 해산, 조기 총선의 부담을 생각하면 주류파는 당연히 모리퇴진을 결정, 비주류와의 타협에 나서는 길 밖에 없었다.

실제로 10일 가토 전 간사장이 "정치인으로서 75%의 국민이 반대하는 내각을 지지할 수는 없다"고 모리 총리의 퇴진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막후 총리'인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간사장은 "가토에게 당했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2일에는 이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이케다 유키히코(池田行彦) 등 18명을 빼냈다"며 "가토파는 곧 둘로 갈라진다"고 선언할 정도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 정도로 가토파의 틈새를 파고 든 노나카 간사장의 공작은 치밀했다.

20일 아침 가토 전 간사장이 TV에 나와 "100% 승산있다"고 장담하는 동안 야마사키 전 정조회장은 양파 의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최종 표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각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토 정권 구상'을 추진해온 니와 유야(丹羽雄哉) 의원까지 이미 돌아선 상황이었다. 비상이 걸린 가토ㆍ야마사키 진영은 야당에게 불신임안 제출을 연기할 수 없느냐고 요청해보기도 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있었다.


주류측, 공천권 들고 비주류 회유

가토 전 간사장이 파벌 내부의 의견에 귀기울이기보다 인터넷과 매스컴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넓히는 동안 발아래의 표는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주류파는 가토파 분단 공작의 최대 무기로 소선거구제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공천권을 들고나왔다. 의원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으나 가토 전 간사장은 그런 불안을 다독거리는 데 실패했다. 불신임안이 제출되기 직전인 20일 낮 노나카 간사장은 "최소 4표는 이긴다"고 자신했고 결과는 정확히 4표의 차이였다.

가토 전 간사장으로서는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를 괴롭혀 주류파의 미움을 샀던데 이어 두번째 좌절이었다.

야당과 여론의 움직임에 편승해 모리 총리를 몰아내고 잘만 하면 총리에 오를 수도 있다는 발상은 기발했으나 자민당 파벌정치는 아이디어만으로 넘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가토 반란'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리 총리는 불신임안이 부결된 순간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불신임안 정국에서 강력한 응집력을 발휘해 모처럼 당내 최대 파벌의 위력을 내외에 과시한 하시모토(橋本)파의 22일 총회에서 노나카 간사장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번 내각 불신임안 부결은 결코 모리 내각에 대한 신임이 아니다. 21세기로의 이행을 앞두고 정당정치의 진가가 도마 위에 올라있으며 모리 총리는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겸허하게 메워나가야 한다."

이를 두고 모리 총리는 "나를 격려하려는 것"이라고 애써 둔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모리파는 하시모토파가 사실상 모리 총리의 경질 방침을 정한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

'가토 반란'을 통해 말썽과 실언이 끊이지 않았던 모리 총리에 대한 자민당 내의 불만이 표면화했으며 적어도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때까지는 새로운 총리 후보를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가토, 반란실패 불구 정치적 영향력 커져

한편 가토 전 간사장에게도 이번 반란과 실패의 경험은 쓴 약이 되었다. 그는 당내 제2파벌의 영수로 가장 강력한 총리 후보로 꼽혔지만 여론조사에서는 늘 5, 6위에 머물러야 했다.

'우유부단', '평론가'의 이미지가 발목을 잡았다. 비록 막판에 항복했지만 여론을 업고 자민당 주류파와 정면 대치한 모습은 일본 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자민당 내에서 보기드문 엘리트 정치인이다. 명문 히비야(日比谷)고교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를 거쳤다. 아사히(朝日)신문에 합격했으나 가지 않고 이듬해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7년반 동안의 외무성 시절, 그는 타이베이(臺北)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중국 문제를 연구하고 홍콩 총영사관과 중국과 근무를 통해 중국 전문가로 컸다. 덕분에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하다.

정계 진출을 서둘렀다면 내무성 관료 출신으로 5선의원이었던 아버지 세이조(淸三)가 급서한 1965년에 이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 공부'를 이유로 후원회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1971년 말 외무성을 나온 후에야 이를 받아들여 정계에 나섰고 이듬해 33세의 나이로 야마카타(山形) 2구에서 당선된 이래 내리 10선을 이루었다.

정계에서 그는 일찌감치 자민당 제2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의 왕자로 불렸다. 이케다 유비토(池田勇人大作) 전 총리가 창설한 파벌로 보수본류를 자임하면서도 역사ㆍ방위 문제에서는 온건 자세를 보여왔다. 그런 전통은 국제파인 그를 더욱 개혁파로 만들었고 특히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이해는 발군이다.

스스로 밝혔듯이 이번에 조용히 있었으면 거의 확실했던 총리 자리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무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후생성장관,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전 외무장관 등의 이름이 대신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자민당의 지배력이 날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여론정치의 발판을 앞장서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잠시의 휴면기를 거치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2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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