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의 세계] 와인 마니아

와인은 멋에 취하는 문화의 술

백성기(50ㆍ백성기치과의원 원장) 박사는 '와인 전도사'로 통한다. 단지 와인을 즐겨 마시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와인을 통해 '폭탄주'로 상징되는 한국의 음주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가 정의하는 와인은 '문화의 술'이다.

그는 와인이 대화의 술이자 천천히 음미하는 술, 소량을 음식과 함께 마시는 술이라고 말한다. 그는 "와인의 문화는 전통적 선비의 음주문화를 회복할 수 있는 한 방편"이라고 강조한다.

백 박사는 스스로를 '와인 러버'(wine lover)라고 칭한다. 와인 전도사이기 이전에 와인을 사랑하고, 즐겨 마시는 사람이란 의미다. 그가 와인을 즐겨 마시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 부인과 함께 맛을 들였다.

약 3년전에는 와인 러버 클럽인 '인 비노 베리타스'에 가입해 동호인과 함께 와인을 즐기고 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와인은 40여종에 120병 정도. 온도(섭씨 17~18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와인저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와인저장고는 일종의 냉장고이긴 하지만 진동이 거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와인이 진동에 매우 민감해 자칫 잘못 보관하면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과소비나 호사가의 비싼취미 아니다"

그는 와인을 공부하며 마신다. 한권 한권 모으기 시작한 와인 관련 원서가 30여권이다. 와인에 관한 국제적 흐름과 새로운 와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 정보를 주변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와인에는 생산지의 자연, 종교, 역사, 인간의 노력이 모두 녹아있어 와인에 얽힌 이야기들은 와인을 마시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고 한다.

그의 가장 친근한 와인 파트너는 부인이다. 식사 때 이야기를 나누며 한두 잔 마신다. 그는 "와인이 가정의 평화를 위한 술이자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술"이라고 예찬한다. 퇴근 후 부인과 촛불을 켜놓고 와인 한두 잔을 기울이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

그는 여행갈 때면 반드시 와인을 갖고 간다. 가장 인상깊게 와인을 마신 것은 지난해 추석 휴가때 주문진 해수욕장에서다.

갈매기만 떠도는, 철지난 해변은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태풍에 쓸려와 해변에 처박혀 있는 책상을 끌어내 즉석 테이블을 만들었다. 부인과 단둘이서 와인잔을 기울인 당시의 기억을 그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동호회원이 즉각 그곳으로 달려가 이를 재연했다고 한다.

그는 와인을 과소비나 호사가의 비싼 취미로 보는데 반대한다. 와인은 형편에 맞춰 누구든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1만~2만원 수준이면 웬만큼 음미하며 마실 수 있다.

한병에 2만원 안팎이면 파리 사람이 마시는 와인 수준이다. 백 박사는 와인에 맛을 들인 뒤로는 양주나 다른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2차, 3차로 이어지기 쉬운 다른 술에 비해 훨씬 경제적이고 다음날 출근과 활력을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와인은 마시는게 아니라 음미하는 것"

의사인 만큼 백 박사는 와인이 주는 건강효과를 강조한다. 그는 플라톤이 와인을 "신이 인간에게 준 최상의 선물"로 극찬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의학계에서 유명한 '프렌치 패러독스'(프랑스인의 역설)는 와인과 직접 연관돼 있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프랑스인이 유럽에서 콜레스테롤 섭취량 최다, 운동량 최소, 흡연인구 최다의 기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병 사망률이 가장 적은 현상을 이른다.

역설의 비밀은 프랑스인이 레드와인을 가장 많이 마신다는 데 있다. 레드와인이 혈소판 응고력을 떨어뜨려 혈전을 방지함으로써 심장병 발생을 억제한다는 것. 백 박사는 와인이 암세포 발생을 억제(특히 식도암)하고 침분비를 도와 충치를 일으키는 박테리아를 죽임으로써 치아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백 박사는 와인을 '눈→코→입→목구멍'의 4단계로 음미한다고 말한다. 우선 눈으로 빛깔을 음미한 다음 코로 향을 음미한다. 향을 음미하는 것은 와인 향과 자신의 정신세계를 교감시키는 과정이다.

기분에 따라서 와인은 허브나 초컬릿 등 다양한 향미를 풍긴다. 다음은 소량을 입에 넣고 와인이 혓바닥의 모든 미각점에 닿도록 굴리며 음미한다. 입술로 공기를 빨아들이며 음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은 삼킨 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잔향을 즐기는 것이다. 잔향은 마치 녹차 등을 마신 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달콤한 맛과 일맥상통한다.

와인만큼 마실 때 격식과 예절을 따지는 술도 없다. 하지만 생각처럼 복잡지도 않고, 한번 익숙해지면 매우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 와인 마니아들의 이야기다. 두산그룹 와인팀 신승준 부장에 따르면 국내 와인 동회회는 100여개. 평균 회원수가 10여명이다.

따라서 와인 마니아수는 1,000~2,000명 수준. 와인은 아직 한국에서 대중화하지는 못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인남녀의 17%가 와인을 마신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전체 주류소비량의 0.5%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마시는 빈도는 매우 적을 것으로 추산된다.


"와인의 참맛은 와인속에 든 이야기"

국내에 수입되는 와인은 100여종. 신 부장에 따르면 마주앙 등 국산 와인 소비량이 65%, 수입 와인이 35% 정도다.

와인 소비는 IMF위기 이전까지 매년 30% 가까운 증가세를 보이다가 환란을 맞으면서 60% 이상 떨어졌다. 1999년 이래 소비가 다시 늘고 있지만 아직 IMF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국내 와인 전문숍은 서울지역 200개를 포함해 400여개. 와인 전문레스토랑도 150여개가 있다. 이들 레스토랑에서는 전문가에게 격식을 배우며 마실 수 있다.

와인은 가격부담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두산그룹 할인매장의 경우 와인값은 국산ㆍ수입을 막론하고 1만원 이하가 65%, 1만~3만원 20%, 5만원 이상이 15% 정도다.

마주앙으로 국산 와인시장의 95%를 점유하고 있는 두산은 지난 11월16일 와인 전문 웹사이트(www.wine.co.kr)를 개설했다.

사이트 방문자들의 질문은 △조리때 어떤 와인을 음식에 넣는 게 좋은가 △무슨 와인은 어디서 사나 △보관방법 △마시다 남은 와인은 어떻게 보관하나 등이 주류를 이룬다.

마이아가 특히 찾는 와인은 어떤 것일까.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의 에노티카 및 식품담당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수요자의 태어난 해와 특정 기념연도에 생산된 와인에 대한 주문이 많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당해 연도에 생산된 와인을 마신다는 이야기다. 와인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와인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 또는 와인에 투영된 추억을 마신다는 마니아의 도락은 일리가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05 20:55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