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가정] 한국 여성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땅의 외국 신부들

데라다 레이꼬(36)씨는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아우내 장터가 있는 천안시 동면 화계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첫손 꼽는 효부다.

일본 큐우슈우 가고시마 태생의 평범한 일본인이었던 레이꼬씨. 그녀가 5년만에 맘씨좋은 한국의 소박한 아낙네로 변한 과정을 되짚어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던 레이꼬씨는 1995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속죄의 마음과 이를 실천하는 한 종교단체에 귀의하면서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 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남편 윤재걸(40)씨. 2남5녀중 장남이었던 윤씨는 당시 5명의 여동생을 결혼시키고도 자신은 35세의 노총각 신세로 있었다.

평범한 농촌 총각이라는 사실, 거기에 85세의 할머니와 67세의 아버지, 두 노인을 모시고 있었다는 핸디캡 때문에 윤씨는 당시 맞선 한번 제대로 보지못했다.

국제 결혼을 연결시켜주는 단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곧바로 백년가약을 맺었다. 레이꼬씨는 이런 윤씨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모두 알고 그것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한 것이다.


결혼 뒤 2년동안은 밤마다 '눈물바다'

그러나 농촌살림이라곤 해본 적도 없던 레이꼬씨에게 상황은 너무도 힘에 부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들이치는 단층 슬레이트 집, 구식 부엌, 두 사람이 누우면 어깨가 닿을 것 같은 작은 방,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펐다.

거기에 아흔이 다 된 시할머니는 치매증세가 있어 이불에다 소ㆍ대변을 싸대고, 시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이런 뒤치다꺼리 외에도 주말에는 면사무소를 다니는 남편과 함께 벼농사를 하고 텃밭에서 무 배추 파 같은 채소를 길렀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두번에 걸친 유산이었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정말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할머니는 누워계시지, 시아버지는 '아기를 못 낳으면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구박하시지, 정말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결혼해서 2년여간은 이불을 덮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매일 혼자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술도 못먹는 남편이 만취돼 들어와 '당신 고생이 많지, 미안해'하면서 제 손을 꼭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감동해 '내가 아니면 이 사람과 저 노인들을 누가 보살피겠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레이꼬씨는 결혼 4년만인 지난해 첫딸 연호(14개월)를 얻었다. 그런데 연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던 시아버지가 지난 11월18일 지병으로 돌아가셔 지금은 병석에 계신 시할머니와 세 식구가 생활하고 있다.

"한국 농촌에서는 마을에 일이 생기면 동네 사람이 서로 품을 팔아 도와주지 않습니까. 저는 말도 잘 못하고 한국 시골 풍습도 잘 몰라 마을 일이 생기면 가서 설거지만 도맡아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사람이라고 어색하게 대하던 동네분들이 지금은 막내라며 이뻐해주십니다"고 레이꼬씨는 말했다.

남편 윤재걸씨는 "아직 결혼해서 고생만 시켰지 외식 한번 제대로 한적이 없습니다. 문화가 다른 일본인인데도 시동생들과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에게도 너무 잘해 인기가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사람이니까 이런 생활을 참고 견디지 한국 여자 같았으면 벌써 집을 나가도 몇번은 나갔을 겁니다. 항상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라고 털어 놓았다.

이런 극진한 보살핌이 동네에 퍼지면서 레이꼬씨는 올해 5월에는 천안시장으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당연한 것을 했는데 과분한 상을 받았다"는 레이꼬씨는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남편, 그리고 밝고 건강하게 커가는 연호를 보면 이제 행복하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고 밝게 웃었다.


장애 남편 극진히 보살피는 '천사 아줌마'

충남 서산시 대산읍 대호리 산골에 사는 은정이 엄마 산토스 자크린(32)씨는 이곳에서 '천사 아줌마'로 통한다.

자크린씨는 1995년 국제결혼을 연결해 주는 참가정실천운동본부를 통해 영농 후계자인 남편 김강호(38)씨를 만났다. 그해 8월 맞선을 겸해 한국에 와 잠시 김씨를 보고 필리핀으로 건너간 자크린씨는 한달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결혼하기로 한 김강호씨가 갑자기 패혈증에 걸려 그만 오른쪽 골반 밑의 다리를 절단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PUP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던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한국에 나와 남편을 보는 순간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결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리 하나를 절단했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힘들어도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올랐지요."

자크린씨는 "건강한 예비 남편의 모습을 보고 갔다가 불과 3개월만에 한쪽 다리가 없어진 것을 보니까. 왠지 가엽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농촌 살림에 몸까지 불편하니까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낮에는 근로봉사를 나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살림살이에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와 밭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자크린씨는 신혼초 병석에 누워 있는 시아버지를 지극히 간호해 건강을 회복시켰는가 하면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단 한마디 불평없이 보살펴 주위로부터 칭찬받았다.

특히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자크린씨는 다리 절단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남편의 사기를 북돋아주려고 자신의 어려움을 참으며 지극 내조를 펼쳐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다.

낙천적 성격에 노래도 잘하는 자크린씨는 올봄 시민회관에서 열린 영농 후계자 가족 노래자랑에서 일등을 할 만큼 구김없이 밝게 생활한다.

3년전 자크린씨는 천금 같은 딸 은정(3)을 낳으면서 본가에서 나오게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예전에 산지기들이 살았던 골방을 개조한 임시 가옥이다. 산골짝이 달랑 서 있는 슬레이트로 지은 단칸방 집이다.

나무를 때서 난방하기 때문에 한 겨울에도 자크린씨는 산에 나무하러 다닌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항상 남편 생각으로 가득하다.

불편한 다리와 잇단 농사일 실패로 생긴 수천만원대의 농가 부채 때문에 풀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그녀에게는 하루빨리 빚을 갚고 세 식구가 오손도손 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자크린씨는 "지금까지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직장을 갖거나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아이를 업고 보따리 장사라도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빚을 갚고 축 처진 우리 신랑 기를 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남편 김씨는 "제가 다리를 절단했을 때 아내가 결혼하려고 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밝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나 자신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0/12/12 19:47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