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입맛도 세월따라 변해요

퓨전스타일로 모양·맛 세대교체

날은 차갑고 바람까지 매섭게 부는 겨울 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거리를 걷다 보면 저절로 노점으로 눈길이 간다.

오뎅 국물인지, 순대인지 비닐 천막 너머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진해지는 특유의 음식 냄새. 이쯤 되면 그냥 지나치기란 여간해서 힘들다. 문득 호떡 오방떡 군고구마 같은, 예전에 입맛을 다시며 먹었던 겨울 먹거리 생각이 나면서 입안에는 군침이 돈다.

하지만 아무리 길거리를 헤매고 다녀도 요즘 그 시절 그 맛을 다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이름은 같은데 아무래도 그때 맛이 아니다. 더러 생전 처음 보는 먹거리도 눈에 띈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10대 아니면 20대만 우글거린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약간의 용기까지 필요하다. 먹어보면 맛은 있는데 뭔가 기대한 만큼은 아닌 것 같다.

역시 세월이 흐르면 입맛도 변하는 걸까.


메뉴 현대화로 신세대 입맛 끌어야

종로에서 19년째 부인과 함께 노점을 운영하고 있는 임형준씨는 세월 따라 변한 입맛의 산 증인이다.

"예전에는 밀가루 반죽이라도 앙꼬만 많이 넣어주면 오방떡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이제는 안 그래요. 밀가루에 우유도 넣고 계란도 넣고 해야 팔리죠.

입맛이 고급화했다고나 할까." 임씨가 절감한 입맛의 변화는 하나 더 있다. "요즘 젊은 사람은 빨간 팥은 너무 달아서 그런지 잘 안 먹어요. 하얀 팥을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서 임씨 부부는 몇해전 IMF 즈음해서 오방떡에서 계란빵과 야구빵으로 메뉴를 바꿨다.

계란빵은 오방떡과 똑같은데 속에 팥 앙금 대신 계란을 부쳐넣는다. 귀가 길에 자주 들러 계란빵을 사 먹는다는 이승희씨는 "너무 달지도 않은데다 한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해 좋다"고 한다.

야구빵은 꼭 야구공처럼 생겼다. 이것도 일종의 오방떡인데 계란 맛이 많이 나는 빵 부분이 훨씬 두껍고 속은 하얀 팥에 땅콩과 호두가루 등을 섞어 고소한 맛이 강하다.

이처럼 메뉴를 현대화한 뒤로 임씨네 노점은 장사가 훨씬 잘된다. 하루에 계란빵에 넣는 계란만 10판이 넘을 정도다. 주고객은 역시 젊은 사람들. 오며가며 들르는 사람과 인근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임씨네 노점 외에도 오방떡류를 파는 인근 노점 대부분이 이처럼 변형된 오방떡을 갖가지 이름으로 판다. 예전과 똑같은 오방떡을 파는 곳은 거의 없다.

겨울철 거리 먹거리의 제왕은 역시 호떡. 그러나 호떡 역시 달라졌다. 요즘 호떡은 크게 세 가지다. 옥수수 찹쌀 호떡, 야채 호떡, 공갈 호떡이다.

옥수수 찹쌀 호떡은 옥수수 가루와 찹쌀 가루로 만든 것이고 야채 호떡은 설탕 대신 피망, 파슬리, 당근 등 각종 야채에 햄을 썰어넣는 것이다. 두가지 모두 기름에 지진다. 일부 노점에서는 거의 튀김에 가까울 정도로 기름을 많이 두르기도 한다.


호떡도 튀김호떡·공갈호떡 등 다양

하지만 요즘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호떡은 역시 공갈 호떡이다. 공갈 호떡은 공갈빵과 몇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중국 호떡이 합해진 듯한 것으로 껍질이 얇고 바삭바삭하며 꿀은 속 껍질에 살짝 발린 정도다.

지지지 않고 납작한 틀에 설탕을 넣은 얇은 밀가루 반죽을 넣고 1분 정도 굽는다. 간혹 반죽이 조금 더 두껍고, 설탕이 조금 더 많이 든 종류도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설탕을 골고루 퍼지도록 반죽을 미는 일. 그래야 빵이 고르게 부푼다.

남편이 사업을 실패해 몇년 전부터 종각역 부근에서 공갈호떡 장사를 하고 있는 김모씨(55)는 "담백하고 달지 않은데다 기름기가 없어 요즘 사람들, 특히 아가씨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일러준다.

손님이 제일 많은 시간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와 점심시간. 이때는 두개짜리 빵틀이 손님을 감당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루에 팔리는 양은 평균 200개 정도. 김씨의 노점을 찾은 어느 50대 중년 여성에게 공갈 호떡이 예전의 호떡과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옛날에는 설탕물을 흘리지 않고 호떡을 먹는 건 거의 불가능했잖아요. 가볍고 부담이 없어 좋긴 한데 아무래도 손을 호호 불며 먹었던 예전 그 맛은 안 나는 것 같애"라는 대답이다.

오뎅, 떡볶이, 순대와 함께 노점의 인기 품목인 김밥도 요즘은 그냥 먹지 않는다. 소금 간을 한 계란을 얇게 부쳐 손가락 크기의 꼬마 김밥을 둘둘 만 계란말이 김밥이 요즘 같은 겨울에는 인기가 좋다.

따끈하기도 하지만 계란 맛이 고소해 일반 김밥에 비해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게 노점상의 한결 같은 얘기다. 과연 요즘 사람은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구운 오징어에 땅콩은 '옛맛'

겨울철 노점의 단골 메뉴인 오징어도 달라졌다. 머리와 다리가 한꺼번에 붙은 마른 오징어 대신 짧은 다리만 잘라 물에 불린 물오징어가 인기다.

1접시에 2,000원인 물오징어는 살짝 구우면 마른 오징어 보다 훨씬 부드럽다.

하지만 땅콩 한 주머니와 함께 연탄불에 구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댔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에게는 좀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한 맛이기도 하다.

오방떡이나 호떡 김밥 오징어 같은 전통적 먹거리가 요즘 입맛에 맞게 바뀌고 있는 반면, 새로운 먹거리도 많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꿀타래와 닭꼬치.

3년 전 등장해 인사동 등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꿀타래는 전통 한과를 응용한 새로운 먹거리.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는 맛도 모양도 신기할 따름이다. 꿀타래의 기본 재료는 엿기름이다.

엿기름을 8일 동안 숙성시켜 덩어리로 만든 다음 옥수수 가루를 묻혀가며 마치 짜장면 만들 듯이 여러번 가늘게 찢는다. 한 덩어리였던 엿기름 덩어리가 두배씩 늘어나서 1만6,000가닥이 되면 마치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진다.

그런 다음 적당한 길이로 잘라 땅콩, 호두, 잣, 아몬드를 섞어 만든 가루를 한 숫가락 얹고 둘둘 말아 엄지 손가락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만든다. 10개들이 한상자가 3,000원.

맛은 강정과 비슷하지만 많이 달지 않고 처음 씹을 때의 질감이 몹시 특이하다.

인사동 통인가게 앞에 유리로 된 작은 박스를 설치하고 손님에게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꿀타래를 팔고 있는 조준호씨는 "입에 많이 달라붙지 않고 속에 든 재료가 고소해 젊은 사람들은 물론, 나이든 사람과 외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좋다. 얼려 먹으면 더 맛이 있다"고 말한다.

노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닭꼬치는 일식집의 꼬치 요리가 거리 음식화한 것. 한 꼬치에 작은 것은 1,000원, 큰 것은 1,300원 정도 하는데 생긴 것은 보통 꼬치와 비슷하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소스를 발라서 굽기 때문이다. 잘게 썬 파까지 뿌려 구워놓은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입맛을 당기길래 한입 먹어보았다. 매콤하기도 하고, 달콤한가 하면 새콤한 맛도 난다.

한 꼬치만 먹어도 금새 혀가 아리다. 종로서적 앞 닭꼬치 노점 아주머니에게 맛의 비결을 물으니 "고추가루와 설탕에 카레가루도 넣고 사이다도 약간 섞고 20여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고 한다. 그 이상은 영업비밀이라고 자세히 일러주지 않았다.


입보다는 마음이 즐거워지는 거리 먹거리

하루 저녁 사이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대여섯 가지 먹거리를 먹고났더니 목이 마르고 약간 느끼한 감이 든다.

노점상들 말대로 확실히 요즘 겨울철 거리 먹거리들이 이것저것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우유와 계란이 주원료인 탓이다.

하지만 모처럼 먹어보는 거리 먹거리들은 혀보다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노점의 비닐을 젖히고 들어갈 때 혹은 불가에 서있을 때의 온기, 무언가 하나씩 우물거리고 있는 사람의, 약간은 포만감에 젖은 듯한 표정,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들와 나누는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공갈 호빵을 팔던 아주머니는 "월드컵이 가까워지면 대대적인 노점 단속을 한다는데."라고 걱정어린 기색을 하다가도 "빨리 첫 눈이 오면 좋겠어. 그런 날에는 매상이 한참 뛰거든"이라고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다. 아주머니의 말에 호떡을 먹고 있던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로 어려워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첫 눈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엇갈리기는 파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듯 했다. 세월이 흘러 입맛은 변해도 겨울날 거리에서 먹거리를 사먹는 사람의 심정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12 21:01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