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보길도

"철모르는 동백이 고산의 풍류를 시샘하네"

"날씨가 좋으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했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식들과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중략)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ㆍ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풍류의 극한에 있는 삶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은 조선 시조문학의 으뜸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년)고 무대는 남도의 끄트머리 섬 보길도다. 위의 기록은 고산의 6대 손인 윤위라는 사람이 남긴 것이다.

인조가 청나라에 굴복하자 고산은 세상을 멀리 하려고 제주도로 향했다. 도중에 풍랑을 피하기 위해 보길도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곳 풍광에 매료돼 정착했다. 그리고 자연과 합일된 수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민중의 삶과 동떨어진 호사를 누렸고, 나라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등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문학세계는 우리 국문학사에서 굵은 흐름을 차지한다.

보길도는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려는 문화유적답사는 물론 다도해 섬 기행, 여름철 피서지 등으로 너무나 유명해졌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현지인(3,700명ㆍ1996년 기준)보다 더 많은 외지인이 북적댄다. 5곳의 포구에서 하루 40여 차례 대형 선박이 왕복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보길도가 썰렁해지는 계절은 바로 겨울. 사람에 치이지 않고 섬의 윤곽과 속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보길도 여행은 당연히 고산의 유적부터 시작된다. 풍류의 정점이었던 세연정과 신선을 꿈꾸었던 산중 정자 동천석실은 제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집이었던 낙서재와 아들 학관이 기거했던 곡수당은 아쉽지만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은거하는 선비의 원림 치고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세연정은 우리 조경 유적 중에서도 특이한 곳으로 꼽힌다. 개울을 보로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정자는 연못과 잘 생긴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고즈넉하게 앉아있다.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지금도 철모르는 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어부사시사'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이곳에서 지어졌다. 동천석실은 세연정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있다.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바위 위에 두 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는 집이 있다. 내려다 보는 풍광이 시원하다.

보길도에는 해수욕장이 세 곳 있다. 가장 특이한 곳이 예송 해수욕장. 해변은 모래가 아닌 돌밭이다.

이곳에서는 '깻돌' 또는 '먹자갈'이라 부른다. 물에서 먼 곳에는 물수재비를 뜨기에 적당한 크기의 납작한 자갈이 깔려있고 파도와 가까워지면서 크기가 작아진다. 모래를 털 일이 없어서 여름에는 편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예송리 바다와 마을 사이에는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 활엽상록수림이 뻗어있다.

동백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측백나무, 후박나무의 줄이 740여 m나 된다. 천연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돼 있다.

중리와 통리 해수욕장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모래해변이다. 다도해의 맑은 물이 모래빛을 반사하면서 코발트색으로 반짝인다.

통리 해수욕장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길 저수지가 있다. 지금은 갈대가 빼곡하게 들어차 바람에 흔들린다. 길에 서서 보면 좌우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한쪽은 녹색 파도가 밀려오고 다른 쪽은 갈색 물결이 일렁인다. 보길도의 겨울이 완성되는 곳이다

권오현 생활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0/12/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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