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전성시대] '순풍…' '한국형 시트콤' 이정표 남겼다

12월5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CCMM빌딩 1층 코스모스홀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선우용녀 박미선 장정희 박영규 등. 방송사에 한 획을 그으며 2년10개월 동안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SBS 일일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의 종영 기념식에 참석하기위해서다.

1998년 3월2일 첫 선을 보인 '순풍 산부인과'는 인기 고공비행을 마치고 15일 692회로 끝을 맺었다.

요즘 시청자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순풍 산부인과가 15일 종영한다는 말이 허풍이었으면 한다", "순풍 산부인과가 끝나면 무슨 재미로 텔레비전을 볼까"라는 등 종영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숱한 화제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막을 내리는 '순풍 산부인과'의 가장 큰 의의는 한국적 시트콤(시추에이션 코미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미국 TV 방송의 독특한 장르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시트콤을 한국 TV에 도입한 것은 1992년 '오박사네 사람들'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미국 시트콤의 흉내에 불과했던 우리의 시트콤이 '순풍.'을 계기로 한국적 시트콤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풍 산부인과'의 성공의 원인을 우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소재를 바탕으로 연기자들이 과장된 몸짓없이 연기를 한 것이 시청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는 김병욱PD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소재의 한계, 왜곡된 가족관계도 문제

전현진 정진영 김의찬 박정미 등 10여명에 이르는 작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재를 공모한 뒤 공동으로 집필한 완성도 높은 극본, 오지명 박영규 선우용녀 등 연기자들의 완벽한 화음, 그리고 김병욱 PD의 남다른 연출력이 빚어낸 결과다.

'순풍.'성공의 또다른 요인은 특정 캐릭터 정형화다.

칭찬에 약하고 비판에 짜증내는 엉성한 가장의 표상 '헐랭이' 오지명, 작은 일에도 목숨 걸고 덤비는 무능력한 '삐질이' 박영규, 철부지 소녀같고 푼수기있는 아줌마의 전형 선우용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오지명과 박영규는 누구나에게 내재해있지만 교양과 체면 등에 가려 쉽게 노골화하지 못했던 치졸함, 속물근성 같은 것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허위의식과 위선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기존의 시트콤에서 무시됐던 아역의 중요 배역 기용도 인기요인으로 작용했다. 자기만 아는 미달역의 김성은(8), 늘 당하면서도 착한 의찬역의 김성민(8)은 징그러울 정도로 능청스런 연기를 하는 아역이다. 이들은 초등학생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인데 일등공신이다.

청문회 방식을 도입한 정치패러디 등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는등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꾀한 것은 시청자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또한 갈등상황을 화해나 용서로 끝내는 일반 시트콤과 달리, 갈등을 그대로 끝내는 열린 구조를 지향, 시청자들이 시트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 것도 관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일상생활 소재, 자연스런 연기로 인기

그러나 '순풍.'도 문제점은 있었다. 일상사를 소재로 단순하게 웃기고 나면 남는게 없고 감동이나 메시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또한 어린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보는 가족 시트콤인데도 룸살롱이 자주 등장하는 등 소재의 한계도 곧잘 드러났다. 군림하는 장인과 쥐어사는 사위 등 지나치게 왜곡된 가족관계 설정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순풍.'은 시트콤으로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KBS와 MBC의 뉴스 시간대에 맞물려 방송을 했는데도 평균 2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SBS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높은 인기로 인해 '순풍.'은 스타 산실의 구실을 했다. 송혜교 이태란 김래원 허영란 등 신세대 스타들이 '순풍.'을 통해 각광을 받았으며 오지명 박영규 선우용녀 등 중견 연기자들이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연기자의 인기는 곧바로 엄청난 광고 수입으로 연결됐다. 자동차 카렌스 공동출연을 비롯해 '순풍.'의 출연진들이 출연한 광고는 무려 50여개로 단일 프로그램 출연진의 광고모델 건수로 최고를 기록했다.

"이 좋은 작품을 작업했다는 사실이 제 연기생활 35년에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같다"는 선우용녀의 말에 대해 시청자들은 "모처럼 즐거운 시트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사진설명> 한국적 시트콤의 가능성을 보여준 '순풍 산부인과'. '순풍 산부인과' 제작진이 종영을 기념한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다. '순풍 산부인과'의 연출을 맡은 김병욱PD.

배국남 문화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12 21:31


배국남 문화부 kn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