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38)] 부라쿠(部落)

원래 작은 마을을 뜻하는 '부라쿠(部落)'라는 한자어가 일본에서는 아주 특수한 뜻으로 쓰인다. 보통의 마을을 가리킬 때는 '마치(町)', 시골에서는 '무라(村)'라고 부르지 결코 부라쿠라고는 하지 않는다.

부라쿠가 교제와 혼인, 취직 등 사회 생활 전반에서 혹독한 차별을 받아 온 특수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는 '히사베쓰(被差別) 부라쿠'의 준말이며 행정 관청은 '도와(同和) 지구', 차별 철폐 운동가들은 '미카이호(未解放) 부라쿠'라고 부른다.

부라쿠에 대한 차별은 에도(江戶) 시대의 봉건적 신분제도 아래 '에타(穢多)', '히닌'(非人) 등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지정됐던 데서 비롯한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신분제도의 철폐에도 불구하고 부라쿠 출신에 대한 차별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일본이 애써 감추어 온 대표적인 치부라고 할 수 있다.

부라쿠 출신에 대한 차별은 재일동포가 귀화를 하고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차별과 극히 양상이 비슷하다. 취직이나 결혼을 앞두고 호적초본을 떼어 보면 귀화 일시가 명기돼 있어 귀화 사실을 알 수 있듯 원적에 조상의 고향 마을 이름이 나와 있다.

전국의 부라쿠 지명이 파악돼 있고 오랜 차별로 일반인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천민 집단의 후예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부라쿠는 16세기말~17세기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해 도호쿠(東北)에서 규슈(九州) 에 이르는 일본 전역에 잇따라 설치됐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적 '겐치(檢地)'를 통해 토지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엄격한 신분제도의 도입, 특히 천민의 신분 고정에 힘을 기울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이런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에도 바쿠후(幕府)의 뼈대로 삼았다.

이렇듯 부라쿠 차별의 제도화는 에도시대에 들어서였지만 도요토미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천민 차별 의식을 제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가마쿠라(鎌倉)시대의 문헌에 부라쿠의 핵심 구성원인 '에타'의 한자 표기가 등장하고 일반적인 양천(良賤) 의식은 율령제 국가가 성립된 7세기 중반께로 거슬러 올라 간다.

중국의 당ㆍ송과 한반도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를 참고해 670년에 일본 최초로 만든 호적인 '고고넨자쿠(庚午年籍)'에 이미 양(良)ㆍ천(賤)의 구별이 명기됐다. 능지기나 노비가 대표적인 천민이었으나 양인의 맨아래 신분으로 수공업 등 특수 기능에 종사한 '시나베(品部)'나 '잣코(雜戶)'도 천민과 거의 같은 취급을 받았다.

율령제가 해체되고 장원제가 자리잡으면서 천민은 국가 조직에서는 해방됐으나 호족과 '지샤(寺社,절과 신사)'에 예속됐다. 그중 가장 숫자가 많았던 것은 '키요메(淸め)'였다. 청소와 오물 처리, 염습 등을 맡았던 신분으로 '깨끗이 하는 역할'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또한 '사람도 아니다'는 뜻에서 '히닌'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걸을 하거나 조잡한 기예를 팔아 먹고 사는 사람, 한센씨병 환자 등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가마쿠라시대에 들어 키요메는 '더러운 존재'라는 뜻의 에타와 동일시됐다. 에타는 '가와라(河原)의 에타'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말뜻으로 보아 '가와라모노(河原者)'와 거의 같은 존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와라모노는 강변에 있었던 처형장의 잡역이나 강변을 무대로 한 가축의 도살 및 가죽 생산에 종사하는 계층이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가와타(皮太ㆍ革多ㆍ皮田)'라는 표기가 나타났다. 가죽 생산에 종사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가와타에 대한 차별 의식은 일본의 종교의식의 바탕에 있는 무속신앙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체 처리나 가축 해체는 가장 금기시된 부정(不淨), 즉 '게가레(穢)'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게가레' 의식이 가와타에 그대로 덧씌워졌다.

에도시대에 들어 가와타는 신분 호칭으로 정착했고 에타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전국 곳곳에 설치된 부라쿠는 에타(가와타)가 중심 세력을 이루어 그 아래의 히닌과 함께 거주하는 격리된 마을이었다. 가축의 도살과 가죽 제조를 맡는 에타, 시체 염습과 처형장의 잡역을 맡는 히닌 등 전문 직능의 구분도 명확해졌다.

히닌은 에타보다도 낮은 신분이었으나 엄격한 조건을 충족하면 양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반면 에타는 자손 대대로 에타였다. 이런 장치는 부라쿠의 연대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됐으며 그런 점에서는 교묘한 천민통치책이기도 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12/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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