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생산의 정치

오레곤에 있는 인텔 공장에 가보면 0.13 마이크론 정도의 회로선폭을 가진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찍혀져나온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 자동차 공장에 가면 1분에 몇대 꼴로 자동차가 조립되어 나온다.

일본의 도요다시에 가면 렉서스 브랜드의 고급 승용차가 하루에 300대 꼴로 출고되고 있다. 소위 현대산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품질 제품의 대량생산 현장이다.

잘되는 공장에 가보면 늘 느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화다. 엄청난 시설을 돌리는데도 사람은 겨우 100명 미만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나머지는 모두 산업 로봇이 처리한다. 공장시설 내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본적 품질검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동화되어 있고 사람은 그저 기계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가나 감시하는 정도다.

그러나 고도로 자동화된 시스템에서 없어서는 절대 안되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공장의 규모나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 등 외형적인 것에 압도되어 쉽게 간과하여 버리고 마는데, 바로 이러한 복잡한 대형 시스템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밀하고 거짓없는 기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작업 로봇은 자신의 작업 대상, 내용 및 소요시간 등 모든 정보를 기록하고 공장 관리자도 거의 바보스러울 정도로 상세한 기록을 남긴다. 물론 자신의 서명과 함께.

우리는 흔히 일본인의 훌륭한 기록문화를 칭찬한다. 대한항공기가 소련 전투기에 피격되어 추락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일본인 승객은 그 상황을 기록하였다. 미국도 그에 못지 않은 엄청난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다.

세계 모든 출판물은 거의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가면 바로 "국민이 무지하면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없다"는 제퍼슨의 뜻에 따라 엄청난 장서와 기록이 상세히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아울러 대부분의 자료들은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 생활은 엄청난 기록을 생산한다. 옆집에 개가 짖어 불만이 있으면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낸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불량품을 구입했으면 먼저 제조자에게 편지부터 보낸다. 물론 구입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락방 한 구석에는 몇년이 지난 영수증을 보관하는 상자들이 쌓여가곤 한다. 변호사들은 단순히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수신인을 파일로 한 문서를 작성할 때도 있다. 사무실에서 받은 우편물은 전부 발신인, 수신일 별로 기록된다. 걸려온 전화도 모두 기록된다.

이렇게 생산된 기록은 의사결정과 집행과정을 추후에 검증 가능하도록 한다. 검증이 가능하면 결국 책임의 소재가 밝혀지고 과정의 투명성이 보장된다.

마치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불량품이 나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거꾸로 따져나갈 수 있는 자료가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다.

한편 기록은 자신을 방어하는 자료로 쓰일 수도 있다. 포드 익스플로러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문제가 되자 포드사는 생산일지 등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전복사고가 타이어 균열 때문이지 적어도 차체 결함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른채 5주일이 지나도 미국민이 동요하지 않은 것은 바로 기록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움직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정치나 행정 행태를 보면 아직까지 기록의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주요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나 토론 자료는 더욱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일반인의 접근은 거의 어렵다.

우리나라 정부 조직 중에서 그래도 가장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법부와 검찰 조직이라는 것도 바로 그곳의 업무가 문서로 기록에 남는 것이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은 끊임없이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견제를 위해서는 책임있고 정확한 기록의 생산이 전제조건이다.

멀리 볼 필요 없다. 세계 제일이라고 하는 삼성전자의 공장을 둘러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반도체와 함께 끊임없이 기록을 생산한다. 그 기록이 바로 오늘날의 초일류 기업을 만든 것이다.

닉슨이 백악관에서 보좌진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해서 나눈 밀담이 공개되듯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측근들과 나눈 논의 내용이 사실(史實)로 공개될 수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가 일류 국가의 대열에 오를 수 있다. 정치나 행정도 이제 기업에서 배워야 할 때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12/2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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