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스 시대] 1인 1직장 시대는 갔다

직업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직업은 한평생 뼈를 묻어야 할 천직으로 여겨져왔던 게 사실. 하지만 최근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여러 직업을 갖는 '멀티 잡'(Multi-Job)의 경향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투잡스(Two Jobs)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경제적 안락과 자아실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낮과 밤, 평일과 주말, 각기 다른 일터에서 다른 일에 몰두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용안정이 아니라 성취와 자기실현이다.

이제 멀티잡은 우리 사회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하늘이 내려준 천직은 옛말

대구 동구 방촌동 길비뇨기과의원 길영태(42)원장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세상을 즐기면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라는 선망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 다른 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잘 나가는 비뇨기과의원 원장인 길 원장이 가외로 하는 사업은 A사 네트워크 비즈니스. 그는 매일 오후 6시30분 병원 일이 끝나면 이 사업을 위해 미팅에 참가하거나 클라이언트가 될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러 다닌다.

주말에도 이 비즈니스 워크샵이나 교육을 다니는데 월 2회 이상을 할애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의 동반여행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스킨스쿠버 같은 취미생활은 거의 못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병원 운영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너무 욕심내는 것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길 원장은 '현대사회에서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선 젊었을 때 치열하게 벌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 결코 이 사업을 포기하기 않을 예정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더이상 집도할 수 없는 때가 되면 아예 이 사업으로 전향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직업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天職)이라 여겨졌다. 젊은 시절 한번 선택한 직장에서 평생을 바쳐 소임을 다하는 것이 옳바른 직업 윤리요, 직업관이라 생각됐었다. 그런 생각은 피고용자들은 물론 고용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퇴직금 적립제, 연공 서열제 등과 같은 고용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오랜 관례들도 바로 이런 평생고용 개념의 자연스런 부산물이었다. 물론 일부에서 직장 외에도 수입을 위해 일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개 부업이나 아르바이트 수준에 머무는 정도였지 '세컨드 잡'(제2의 직업)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자기 직업이 있으면서도 퇴근 후나 주말, 휴일의 여가시간을 이용해 또다른 직업을 갖는 투잡스족들이 몰라보게 늘고 있다. 이들은 대개 본 직장에서 눈총을 받을까 두려워 비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숫자는 상상외로 엄청나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 총무과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최모(37) 과장은 연말을 앞두고 고민거리 하나가 생겼다. 사업이라곤 모르던 최 과장은 올해 4월 무역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중학교 동창 등 3명이 함께 종자돈 3,000만원씩을 투자해 인터넷 벤처회사를 차렸다.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당시 동창생들이 여성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는 한 벤처회사에 투자해 수억원대의 거금을 챙겼다는 소문을 듣고 가까운 친구끼리 손을 잡은 것이다.


연말정산으로 드러난 '세컨드 집' 실태

이중 무역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아예 퇴사해서 대표로 일하고 최 과장과 중학 동창은 퇴근 후에 합류한다. 최 과장은 주말도 휴가도 마다한 채 벤처 사업에 매달렸다. 회사에서 열리는 회식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정중히 사양하고 회사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잦은 밤샘에도 피곤한 줄 몰랐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이 회사는 창투사로부터 1년여 이상 회사를 유지해갈 만한 액수의 투자도 받았고, 직원도 상근직만 5명으로 느는 등 불황기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과장은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벤처 기업의 존립이 불안하니 회사만은 유지해 달라'는 아내와 부모님의 간곡한 만류로 8개월째 이중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가 나빠지면서 최 과장 자신도 회사를 계속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회사에는 아직 비밀로 하고 있어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최 과장은 최근 연말 세금공제 정산을 계기로 부서 동료 중 절반 가량이 자신처럼 '딴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말 소득공제를 받기 위해선 한해 동안 근로를 통해 벌어들인 소득액을 빠짐없이 신고해야 이중 원천징수한 세금 일부를 돌려받고 추후에 2중 근로소득으로 중과세를 맞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료 중 절반 가량이 다른 곳에서 별도로 올린 수입 근거서를 가져와선 담당자인 최 과장에게 "제발 회사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읍소를 해오는 것이 아닌가. 최 과장 자신도 이 문제로 고민하던 차에 이처럼 많은 주변 동료와 선ㆍ후배들이 다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최 과장은 올해 초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던 엑소더스 현상이 이것과 무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처럼 한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직업과 직장을 동반하는 투잡스족이 생기게 된 것은 1997년 IMF 환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당시 악화된 국내 경제 상황으로 명예퇴직, 조기퇴직 등이 대거 실시되면서 평생 직장이라는 기존의 믿음이 일시에 붕괴됐다.

여기에 외국계 회사들이 한국 진출의 첫번째 개선 조건으로 우리의 평생고용 관행 타파를 주장하면서 평생고용의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98년 2월 재계와 외국회사들의 압력에 밀려 국회에서 '경영상의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는 골자의 정리해고에 관한 규정을 넣은 근로기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평생직장에 대한 법적인 근거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그후 근로자들은 '더이상 직장이 나의 노후까지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이 투잡스족을 탄생시켰다.

올해 5월 모 인터넷 채용정보사이트가 실시한 직장인의 직업의식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5명 가운데 1명이 '부업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PC통신이나 인터넷에서 창업과 부업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의 한달 접속 건수가 1만건에 달할 정도로 창업이나 부업에 대한 관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투캅스족의 유형은 천차만별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전공파'. 한국 야쿠르트의 마케팅 교육팀의 이경철(43) 차장은 자신의 직업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다.

이 회사 교육 담당자로 입사한 이 차장은 사내 별도 기구인 친절아카데미 강사로 나서 사원들에게 고객만족 강의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강사가 됐다. 사내는 물론이고 서울시내 구청과 지방 군청, 일반 기업체, 공공기관, 공사 등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

강사료도 일반 강사에 두배가 넘는 시간당 25만원 수준을 받는다. 회사 본업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대부분을 사양하고 새벽 출근전이나 늦은 밤시간, 휴일에만 틈틈히 강의를 하는데도 회사 월급의 몇배에 달하는 거금을 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명성이 알려지자 이제는 회사가 홍보 차원에서 오히려 이 차장을 밀어주고 있을 정도다.


IMF 이후 위기의식 커지면서 늘어나

자신의 특기와 취미를 살려 돈을 버는 '실속파'도 적지 않다. 대학서 미술을 전공했던 서울 모구청 직원 정(30)모씨는 퇴근 후 동네 마을회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주2회 미술 강의를 하고 있다. 한때 국전에서도 입선한 적이 있는 정씨는 평소 그림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그림을 접할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최근 불황이 심각해지면서 '젊어서 고생은 뭐든 가리지 않고 한다'는 식의 '불도저형'도 늘고 있다. 대기업 계열 유통회사의 직원인 이모(34) 주임은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혹사하는 불도저형의 전형이다.

이 주임은 유통업이 오전 9시30분까지 출근해도 된다는 점을 활용, 새벽 5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 가정집 150여 가구에 우유배달을 한다. 그리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일본어 번역을 하며 용돈을 충당한다.

유통업의 경우 평일에 쉬는데 이때는 원고 마감을 하거나, 우유 수금을 하는 날이다.

젊은층 사이에서는 근무시간 중 직장 상사 몰래 하는 '007파'가 늘고 있다. 이 부류 사람들은 주로 전화 설문 응답하기, 전화광고 들어주기, 인터넷광고 주기, 인포숍 자료 올리기, 경품 가입하기 등 주로 전화나 인터넷상에서 마우스 클릭만으로 간단히 교통비 정도를 버는 방법을 애용한다.

하지만 투잡스족 중에는 자신의 직업을 치부의 도구로 활용하는 몰지각한 사람도 없지 않다.

정보통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에 근무했던 모씨는 회사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 기밀사항을 친척과 함께 설립한 벤처회사로 빼돌리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다 발각돼 철창신세를 졌다.

또 대기업 전자제품 회사에 근무하는 박모씨는 용산 전자상가에 사촌동생 이름으로 부품 대리점을 차린 뒤 자신이 직접 물량을 챙기는 '짜고치기식' 사업을 해오다 덜미가 잡혀 해고되기도 했다.


다양화·다변화 사회의 대세

노동부 중앙고용정보관리소 직무분석과 박천수 박사는 "멀티잡 현상은 산업구조가 다양화ㆍ고도화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근로시간이 줄고 여가시간이 증가하면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며 "고용주에게는 다소 불리한 점도 없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인이 삶을 보다 풍요롭고 적극적으로 살도록 동기 부여를 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제 직장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수직적 피라미드 조직이 사라지고 연봉제, 능력급 인센티브제, 수시 고용과 해고, 연공서열 파괴식 인사제 등의 수평적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하면서 직장인의 멀티잡 성향은 갈수록 확산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선 투잡스족의 증가가 한 직장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상실케 하고 직장을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멀티잡은 다변화ㆍ다양화 사회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이제 피고용자나 고용주 모두 그것을 공개하고 인정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모를 없애고, 보다 전문화ㆍ다양화ㆍ고도화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만드는 지혜를 짜내야 할 때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3 15:51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