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스 시대] 늘어나는 여성 투잡스 족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천신덕(39) 주부는 요즘 신바람이 난다. 결혼 후 줄곧 집안에서 살림만 하다가 지난해부터 10년여만에 전업주부 이외에 또하나의 직업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천씨가 매일 나가는 직장은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위치한 한 대형 할인마트.

그곳 지하 1층 식품매장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캐셔로 일하고 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로 가까운데다 근무시간도 하루 8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어 살림에 그리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천씨가 투잡스(Two Jobs)족 대열에 뛰어든 것은 집안 살림에서 벗어나 '나만의 일을 갖겠다'는 일념 때문. 처음 입사지원서를 낼 때는 주변으로부터 '돈이 궁해서 그런가'라는 눈길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천씨의 남편은 현재 외국계 컴퓨터회사 부장으로 연봉 7,000만원을 받는 고소득자. 처음 천씨가 이 일을 하겠다고 하자 극구 말리던 남편도 지금은 천씨를 적극 도와주는 후원자가 됐다.

천씨가 한달에 받는 월급은 대략 60만원 정도.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근로의 기쁨도 맛보고, 견문도 넓힐 수 있어 매우 만족한다.


"본업은 주부, 세컨드 잡은 캐셔"

"미국 일본 유럽 등 외국에 가보니 주부들이 여유시간에 일을 하는 게 웬지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일을 찾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이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 본업은 주부이고, 세컨드잡은 캐셔라고.." 틈틈이 주부 인터넷강좌도 수강하고 있는 천씨는 앞으로 집에서 인터넷만으로 할 수 있는 소호(SOHO)사업도 구상 중에 있다.

여성 투잡스족이 늘고 있다. 그동안 경제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엄연히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여성이라는 성적 한계 등이 여성의 사회진출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IMF 한파와 불황, 그리고 잇단 구조조정 여파로 실직하거나 파산하는 남편이 늘면서 남편 대신 직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여성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여성은 주로 파출부, 식당일, 할인매장 캐셔, 우유나 신문 배달, 아기보기 같은 시간제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예가 대부분이어서 오히려 투잡스족 비율은 남자보다 더 높다.

여성 종사 직종이 대개 급여가 적고 고용도 불안하기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든 여성의 경우 대개 2~3개의 일용직을 겸임하는 예가 흔하다.

최근에는 여성이 이런 일용직 위주에서 탈피, 아예 소규모 자영업을 차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놀이방, 음식점, 팬시용품점, 아이스크림점, 액세서리점, 꽃집, 포장마차, 화장품점, 옷가게 등은 여성 창업의 단골 사업 아이템이다. 또 구조조정의 한파가 다시 몰아친 올해 말에는 실직한 남편과 함께 창업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서윤숙(35렛?씨는 요즘 들어 달라진 남편의 태도를 보면 은근히 신바람이 난다. 대학 졸업 후 6개월만에 남편과 결혼하는 바람에 직장생활이라곤 해 본적이 없는 서씨가 어엿한 주부 사업가로 변한 것은 2년여전.

집안에서 두 자녀를 키우는 일 밖에 모르던 서씨는 1998년 IMF체제 당시 증권사를 다니던 남편이 주식투자로 1억원이 넘는 큰 돈을 잃어 생계가 막막해지자 팔을 걷어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서씨가 처음 시작했던 일은 우유 배달.

새벽 5시부터 동네를 누비며 우유배달을 하던 서씨는 두달만에 계단에서 넘어져 3주간 일을 못하는 바람에 이 일을 중단했다.


일용직 일변도에서 자영업으로 영역 넓혀

이후 찾아간 곳이 파출부를 소개해주는 소개소인 부녀복지회. 이곳을 통해서 서씨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1년여간 파출부 일을 했다. 하루 6시간씩 일주일에 5일을 일하면 버는 돈은 약 50만~60만원.

그래도 '젊었을 때 한푼이라도 모아두자'는 생각에 고생도 마다 않고 일을 했다. 그런데 올해 5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이 가정복지관 소장이 미국 이민을 가면서 이 복지관을 팔려고 내놓은 것.

서씨는 금융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언제 실직하게 될지, 그리고 노후에 대비를 겸해 이 복지관을 인수키로 했다. 더구나 파출부를 하려는 사람이 몰려들어 사업성도 꽤 있다고 판단됐다. 서씨는 모아둔 돈과 은행 대출을 받아 시누이와 함께 이 복지관을 인수했다.

그리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 생명보험사 설계사로 등록해 틈틈이 파출부 아줌마를 대상으로 보험판매까지 했다. 지금은 사업이 자리를 잡아 오히려 남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서씨는 예전에 퇴근만 하면 안방에 누워만 있던 남편이 지금은 손수 밥도 하고 청소도 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진영이 엄마'로만 있던 자신이 불과 1년여만에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에 서씨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요즘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슈퍼마켓, 아파트분양소, 전단배포업소, 임시매장 등에는 파트타임직이라도 얻으려는 주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서울 L백화점은 매달 10여명의 주부 모니터 요원을 모집하는데 상반기에 10대1이었던 경쟁률이 하반기에는 30대1을 훌쩍 넘겼다. 일산 E마트의 경우도 매달 결원이 생길 때마다 수시채용을 하는데 대기자들이 항상 몰려 선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E마트의 인사담당자는 "최근 경기가 나빠지면서 매장 판매일을 하려는 주부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며 "파트타임 일을 하러 오는 주부 중에는 남편이 기업체 이사급 간부나 교수, 은행 간부, 고위 공직자 부인, 검찰 관계자 등 사회 지도층 남편을 둔 주부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모 중견기업 이사의 사모님인 박예심(51ㆍ여)씨는 벌써 6년째 파출부 일을 하고 있다. 1994년 자식들이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때 수백만원 드는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남편 몰래 파출부 일을 시작한 것이 지금은 직업이 돼버렸다.

3년전 남편 친구들과 부부동반 온천 야유회를 갔는데 한 남편이 "당신 손은 왜 이리 거칠어. 저 친구 부인 손은 저렇게 고운데" 하는 핀잔을 받고 크게 낙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박씨는 그날 밤 남편에게 파출부 일을 한 사실을 털어 놓았고, 이를 안 남편은 이후 박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불건전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도

하지만 일부 투잡스 여성 중에는 옳지 못한 방법으로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경우도 있다. 명동 모 의류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배(23)모양은 퇴근 후에는 강남의 고급 룸살롱에서 접대부로 일을 한다.

배양의 경우 의류점 일은 부모님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 수단이고, 수입이 많은 접대부 일이 주업이다. 배양의 경우처럼 유흥업소 접대부 중 상당수가 낮에는 다른 직장에 다니는 투잡스족이다.

여성 투잡스족은 자기성취나 자아실현에 중점을 두는 남성들과 달리 적은 임금과 불안한 고용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자칫 불건전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우리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인력을 보다 효율적이고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의사보다 사업가를 자처하는 유준곤 원장

경기도 부천시에서 12년째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유준곤(40ㆍ사진) 원장은 자신의 본업이 의사가 아닌 사업가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유 원장이 안정된 의사보다 전망있다고 보는 사업은 바로 암웨이 네트워크 비즈니스.

5년전 동료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 지금은 1,000가구가 넘는 파트너를 유지하고 있는 에메럴드급까지 올라갔다. 아직 치과의사로 버는 수입보다는 약간 못한 월 500만원여의 성과급을 올리지만 앞으로 4~5년만 지나면 수입이 역전될 것으로 보고 있다.

유 원장의 하루는 매우 숨가쁘게 돌아간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는 치과에서 환자들을 돌본다. 점심시간이나 환자가 없을 때는 사업 자료를 검토한다. 퇴근 후에는 이 사업 모임에 나가 그룹 강의를 하거나 사업 파트너들과 함께 일을 한다. 주말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에 투자한다. 유 원장의 아내인 조강미(36)씨도 낮에는 유씨의 사업을 돕고 있다. 유 원장은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고, 미래에 투자한다.

젊었을 때 시간을 쪼개 가능성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것 만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없다. 그 일부를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3 15:58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