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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문화-경제]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기

과거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계열사 경영인을 '머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경영자들은 총수의 수족에 불과할 뿐 독자적인 결정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면에 현대그룹 '왕자의 난'의 과정에서 나타난 그룹 고위 경영인의 역할은 머슴과는 판이했다. 현대가의 왕자(2세)를 옹립해 세력권을 다툼으로써 자율적 활동공간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줬다.

한국 재계의 가신경영 스타일은 한보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느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기업 가신경영의 배경은 정치판의 가신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보스나 총수는 돈줄과 임명권을 비롯한 전권을 틀어쥐고 중간보스의 충성경쟁을 이끌어낸다. 보스나 총수의 심리 역시 비슷하다. 보스가 정당을 '내 것'으로 여기듯 기업의 총수는 기업을 '내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보다 한발 앞선 가신체제 탈피

이런 점에서 정치권력에 의한 재계 개혁은 다소 아이러니다. 적어도 가신체제 탈피에 관한 한 재계는 정치권보다 한발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식으로 핀잔을 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재계가 가신경영체제에서 보다 일찍 빠져나오고 있는 것은 변화의 힘에 의해서다. 창업주의 사망과 퇴진으로 재벌이 2, 3세 경영체제로 전환되면서 가신 경영인의 입지가 함께 좁아진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을 제외하면 가신이라 부를만한 경영인이 없다.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인정받아온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현재도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로서 3세인 이재용씨를 위한 상속문제 등을 처리해왔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현재 전문경영인 중심의 계열사 운영체제를 어느 정도 구축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삼성은 4대 재벌 중 상대적으로 소유와 경영이 가장 잘 분리된 경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영과 관련해 결정적인 사항은 오너측의 지침을 받지만 일상경영은 계열사 사장이 직접 결정한다는 것이다.

SK그룹은 비오너인 손길승 회장이 총수로 있어 외형상 전문경영인 체제를 수립했다.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과 동생 고 최종현 회장, 최종건 회장의 아들인 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 과정에서 가신그룹이 쇠퇴한 것이다.

물론 손길승 회장이 창업에서부터 봉사한 가신 출신인데다 최태원 회장의 대권승계 시점까지만 그룹을 이끄는 과도기적 인물이란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다.

LG그룹은 가신경영 개념이 거의 없는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과 구자경 회장에 이은 3세다. LG는 가신경영을 대신해 오너가 전면에 나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오너 일가가 전문경영인과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룹을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LG부회장은 구본무 회장의 3촌벌인 구자홍씨가 맡고 있고, 사촌인 구본분씨가 LG필립스 LCD 사장으로 있는 것이 그 예다.

하지만 LG그룹은 족벌경영이란 또다른 화살은 피하기 어렵다.

현대그룹의 가신경영 색채가 4대 재벌 중 가장 선명한 이유는 이같은 사실을 뒤집어 보면 해답이 나온다. 창업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생존해있고, 여기다 형제간 세력다툼이 개입돼 가신들에게 활동공간을 열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대건설이 모기업인 데서 보이듯 건설 중심의 독특한 기업문화가 가신집단을 형성시킨 토양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현대, 오너집단과 가신집단 혼재

현대의 경우는 오너집단과 가신집단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최악의 조합을 보여 주었다. 현대그룹을 온존시킨 가운데 정몽헌 회장에게 총수자리를 양위하려는 '왕회장'의 의도가 2세간에 싸움을 촉발시켰고 여기에 가신들이 개입한 것이다.

정몽헌 회장을 옹립하려는 핵심세력은 이른바 '가신 3인방'.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부사장(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정몽헌(MH), 정몽구(MK) 회장의 대권다툼은 결국 MK가 현대ㆍ기아자동차를 싸들고 분가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도위기에 빠진 현대건설 처리문제를 놓고 MH 진영의 가신끼리 내분에 빠졌다.

MH와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이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중공업ㆍ현대전자 주식을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하려하자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이 반대한 것. 현대전자 박종섭 사장도 MH의 현대건설 지원방안 마련 지시에 항명했다.

이래서 나온 것이 MH계 가신 구주류(김윤규, 김재수)와 신주류(김충식, 박종섭)의 분열론이다. 앞서 이익치 회장은 지난해 8월 김재수 부사장의 공격을 받고 퇴진했다.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의 항명 사유가 재미있다. 김충식 사장은 "현대전자와 현대중공업의 주가가 크게 하락한 마당에 두 회사의 주식을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한다면 주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른바 '주주의 권익'을 거부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김충식 사장이 탈가신, 전문경영인화했다는 말인가. 일반적인 시각은 그렇지 않다. 2세간의 지분싸움과 가신간 세력다툼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생존위해 가신 중용

가신경영은 분명히 퇴조단계에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재벌에서 가신경영이 일반화한 이유는 뭘까. 경영학계의 일각에서는 이를 '진화론'으로 설명한다.

오너들이 기업외적인 제재, 다시 말해 정부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충성도가 높은 경영진을 임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너들이 자기보호와 생존을 위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신을 중용했다는 이야기다.

경원대 경제학과 홍종학 교수는 따라서 가신경영 자체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총수의 황제식 전횡을 방지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신경영의 문제도 따지고보면 총수의 전횡을 방지하고 견제할 수 없다는 가신경영인의 태생적 한계에 있다.

가신경영인의 반대개념은 전문경영인이다. 현재 한국 토양에서 양자간의 경계선은 매우 애매하다. 현재 상당수 재벌 계열사의 경영인은 공채 출신으로서 그룹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경영능력과 충성도를 모두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전문경영인과 가신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경실련 정책실 위평량 부실장은 가신 경영인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정기업에서 20~30년을 커온 사람이 총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외부의 전문경영인 영입은 가능할까. 딜레마다. 홍종학 교수는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경영자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기는 객관적으로도 어렵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경영자 시장 형성과 함께 재벌 계열사간 연결고리의 약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열사 독자경영을 통해 경영인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토대를 만들고 이 토대 위에서 무능력 경영인을 퇴출시키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입력시간 2001/01/0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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