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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랐으니 노여움 푸시죠"

한적총재 파문으로 들어난 끌려가는 대북정책

지난 12월28일 서영훈 전 민주당 대표가 신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됨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 가장 껄끄러웠던 남북현안이었던 북한의 장충식 전 총재 비난 파문은 일단락됐다.

장 전 총재 파문은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그 파문이 우리 사회와 남북관계에 미쳤던 영향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이유는 이 파문의 핵심이 남북관계의 효율성 만을 중시할 뿐 그 이외의 요소, 즉 명분이나 국민정서 등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남측 당국의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북측도 이러한 남측 당국의 태도를 이미 간파하고 있어 이와 같은 사태가 언제라도 재연될 소지가 있다는 게 일반 국민의 우려다.

지난달 23일 장 전 총재가 사임했을 당시 언론이 "결과적으로 북한측의 흔들기로 장 총재가 낙마했다"며 북측의 한적 총재 인사권 행사를 꼬집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언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측 인사를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한에 준 이번 파문을 정밀 복기해야 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유감서한 전달 등으로 북한 달래기

장 전 총재 파문은 지난 11월 3일 북한 방송으로 시작됐다. 평양방송은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 성명 보도를 통해 장 전 총재의 월간조선 10월호 인터뷰 기사를 거론하면서 "그의(장 전총재) 언동은 처음부터 마감까지 대화상대인 우리를 심히 자극하는 것으로 일관됐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 방송은 "그는 인터뷰에서 평양은 지난 10년간 발전이 아니라 정체되어 있었다느니 따위의 험담을 늘어놓았다"며 "정치체제까지 걸고 드는 망발은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며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밝혔다.

북측은 결론적으로 "우리는 적십자인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를 한 사람이 남조선 적십자의 책임자로 있는 한 그와 상대하지 않을 것이며 당면한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 교환과 앞으로의 북남 적십자회담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국과 전문가들은 당시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2차 방문단 교환이 북측 사정으로 지연되는 상황에서 장 전 총재 문제를 꼬투리로 삼아 지연의 명분을 얻어내려는 것으로 북측 보도를 분석하는 분위기였다.

긴 안목에서 면밀히 예측하고, 그 후유증을 충분히 염두에 두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태는 이때부터 꼬였다.

당국은 북측 방송이 나온지 하루 뒤인 11월4일 비공개리에 장 전 총재 명의의 유감 서한을 북한에 보냈다. 서한은 "월간조선 기사의 일부 내용이 본인 의사와는 달리 잘못 표현됐으며 왜곡정리되어 보도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북측을 자극하고 불편을 끼친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당국과 한적은 이 유감 편지로 사태가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청와대 일각에서는 장 전 총재 인책론을 흘리면서 북측 감정을 어루만지는 모습도 연출했다.

사실 장 전 총재도 11월7일 국회 보건복지위에 출석, "시간이 가면 북한도 이해할 것"이라며 낙관론을 피력했다. 장 전 총재는 그 자리에서 "이번 일은 사과할 사안도 아니고, 사과하는 입장도 아니다"라며 서한 전달 사실에 관해 시치미를 뗐다.

당국과 한적의 이같은 기대는 북한의 11월9일 방송으로 물거품이 됐다. 평양방송은 북적 대변인 성명을 인용, "남측 적십자사 총재라는 사람이 왜곡정리니, 유감이니 하는 한두 마디 말로 인도주의 문제 해결에 끼친 후유증을 가시고 우리를 모독한 죄과를 씻을 수 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며 "우리측에 보내온 편지의 진실성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남측이 공개하지 않은 서한을 북측이 방송으로 공개한 사실 자체가 호락호락하게 매듭짓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북측은 경제악화로 남북관계 속도조절론이 고개를 들면서 급격히 남북문제의 열기가 식어가는 남쪽 분위기에 대한 우려를 장 전 총재 비난에 담으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어정쩡한 정부태도, 국민자존심에 상처

유감서한 공개직후 남측 당국은 배신감을 느꼈다. 2차 장관급 회담 당시 박재규 남측 수석대표와 북측 전금진 단장은 "서로 오해할 일이 생기더라도 직접 연락해 진의를 파악하기전까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남측 당국은 배신감을 느낄 여유도 없이 '유감서한을 왜 공개하지 않았는지', '유감서한을 쓴 주체는 누구인지' 등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였다. 통일부 당국자는 "한적이 유감편지를 보내는 분위기만 알았다"고 면피하는 모습이었고, 한적 관계자들은 "사실상 당국이 처리한 서한"이라고 발을 뺐다.

당시 장 전 총재가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상당히 소외됐던 것 만은 분명한 듯 하다. 추후에 알려진 바로는 한적 실무자들이 통일부, 국정원 당국자들과 상의해 문안을 작성했고, 장 전 총재는 이를 알고 추인했다.

하지만 장 전 총재 파문의 하이라이트는 2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이뤄지기 직전인 11월29일의 돌연한 일본 방문이었다. 당시 박기륜 한적 사무총장이 방일을 장 전 총재에게 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총장은 이때 통일부, 국정원 당국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당국은 또 장 전 총재가 건강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하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방일로 인해 장 전 총재의 체면은 결국 땅에 떨어졌다.

사실 유감서한을 보낸 뒤 당국은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파문을 수습하려 했으나 북측은 막무가내로 "장 총재가 방문단 사업 전면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만을 보내왔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장으로 서울에 온 장재언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은 "장 총재는 죄에 죽고 올바르게 재생해야 한다"며 듣기민망한 발언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결국 당국은 국민정서, 장 전 총재의 체면 등을 경시하면서 남북관계의 원활한 진행만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방일기간중 장 전 총재가 방일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내가 어린애냐"고 볼멘 소리를 낸 것도 이러한 맥락인 것 같다. 한 당국자는 "당시 코 앞에 다가온 2차 이산가족 방문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그같은 사태가 진행됐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정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장 전 총재의 외유로 국민적 자존심이 크게 훼손되고 북한에 대한 관용도가 크게 떨어지는, 충분히 예견가능했던 부작용을 무시했다.

국민 대다수는 남북 화해협력이라는 큰 틀의 대북 정책에 동의하면서도 남한 체제의 자존심과 직결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에서도 그냥 넘어가기만 하는 당국의 태도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대북 문제 전문가는 "정부가 북측에 강력히 항의하거나 사과를 촉구할 대목에서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생긴 상처들이 이제는 큰 틀의 대북 정책 추진에도 걸림돌로 작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이산가족사업 주도권 애매

속으로 곪기만 했던 장 전 총재의 속내는 12월21일 박기륜 사무총장 해임을 통해 밖으로 분출됐다. 박 전 총장은 장 전 총재의 방일을 건의했던 당사자였다.

당시 한적 관계자는 "장 총재는 박 총장이 총장 중심으로 이산가족 사업을 진행하려 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고 동시에 자신을 소외시킨 당국에도 불만을 터트리고 싶어했다"고 전했다. 박 총장 해임을 당국에 대한 항의표시로 해석한 것이다.

장 전 총재의 후임자인 서영훈 신임 총재는 취임 일성으로 "한적은 대북사업 등 여러 분야에서 당국과 협조해야 하겠지만 주도권은 한적이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임자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 한적의 위상으로 주도권을 행사할지는 의문이다.

한편 12월 중순 평양에서 진행된 4차 장관급 회담에서 박재규 장관은 장 전 총재문제와 관련, "장 총재 비난은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재언 북적 위원장은 서울에서의 발언을 되풀이한 뒤 "남북 화해협력의 걸림돌은 제거돼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북측이 지정한 걸림돌은 제거됐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북측의 약속은 아직도 없다.

이영섭 정치부 기자 younglee@hk.co.kr

최종옥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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