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오지탐사전문가 박노익

"자연은 인간을 순수의 늪에 빠뜨리죠"

대학엘 꼭 가야하나.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친구들이 학원 시간표를 짤 때 그는 여행계획표를 만들었다. 학기 내내 용돈을 모아 떠난 무전여행.

차비가 떨어지면 버스도 공짜로 얻어탔다. 교사인 부모님도 말릴 틈 없이 혼자 산간벽지를 떠돌기 좋아했던 소년. 그후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전여행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오지탐사전문가 박노익(37).

"혼자 다니는게 뭔 재미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는 것, 때묻지 않은 자연과 순수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 어느 화려한 관광지를 도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습니다."

고교 졸업후엔 공사장 배관공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자전거를 구입, 혼자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기도 했다.

1983년 특전사로 자원해 입대한 군생활 6년은 특히 소중했던 시간. 돌이켜보면 오지탐사에 필요한 모든 기초를 그곳에서 얻었다. 한번 작전에 투입되면 길게는 한달씩 이어지는 야전생활. 주어진 것이라곤 수행과제뿐.

나침반, 지도만으로 어떻게든 지시받은 목적지까지 찾아가 임무과제를 마쳐야하는 특수훈련이었다. 혹독하지만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모험심과 도전욕,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주었다. 평생 직업군인으로 살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푼푼이 모은 월급으로 오토바이까지 한대 장만해 휴가때면 어김없이 전국을 떠돌던 천상 방랑자.


히말라야에서 발견한 자신의 적성과 이상향

군복을 벗을 결심을 한 것도 휴가중 여행길에서였다. 전국일주중 제주도에서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던 길에 들른 남해대교 휴게소. 집어든 신문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해외여행 자유화' 소식이 있었다.

입대전부터 '배낭족'이란 책을 보며 세계일주를 필생의 꿈으로 간직했던 박씨.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휴가가 끝나자마자 바로 전역지원서를 내고 세계 배낭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여행 후 뒷걱정은 닥치고 볼 일. 퇴직금으로 받은 전재산 375만원을 그렇게 아시아 배낭여행 6개월에 다 털어넣었다.

귀국후 여행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서울 인사동의 한 여행사에서 여행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는 일을 보았다. 일본 도자기여행, 치앙마이 트래킹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는 등 약 5년간 일하다가 단짝 동료가 일을 그만두면서 함께 사표를 내고 나왔다.

그 직후 다시 네팔과 인도, 파키스탄 등 히말라야 일대 6,000km를 종주하는 자전거 대장정을 벌였다. 오지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히말라야는 세계에서도 가장 대자연다운 자연이 남아있는 곳. 신통치않은 영어실력 대신 무슨 말을 쓰는지도 모를 희귀종족에게서도 눈짓 손짓으로 식사까지 대접받은, 자못 씩씩한 한국 청년이었다.

순박한 원주민의 인심은 세계 공통. 히말라야의 품안에서 자신의 적성과 이상향을 발견했다.

현실로 돌아오자 갈등이 시작됐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남들처럼 살 궁리도 해보았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아는 친척 소개로 서울 장안평에서 두달간 중고차 판매일을 했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화물차를 운전하는 일도 6개월.

그러나 "도로에 내 인생을 버리는 것 같아" 그만뒀다. 암사동의 한 가구점 점원으로도 반년동안 근무했고 유치원에 학습교재를 납품하는 장사도 벌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일에도 좀처럼 마음이 맞지 않았다. 고민만 껴안은 채 20대가 허탈하게 저물었다.

서른살, 결혼과 함께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맞는 건 여행뿐.

힘들어도 더이상의 최선은 없었다. 가진 돈을 다 털어 고물 중고지프차를 한대 마련해 '다른 길'이란 이름으로 오지여행전문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 자체가 그야말로 미답의 오지를 헤매는 격이었다. 평소 의기투합했던 여행동호인을 주고객으로 전국의 오지를 찾아다녔다.

남들이 모르는 곳을 찾기위해 눈에 띄는 신문, 잡지 기사마다 빽빽히 스크랩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에게도 귀동냥을 했다. 오지는 오지라서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았다. 상세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깡촌을 찾기 위해 지역군청이나 면사무소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사고도 많았다. 강원도에서 겪었던 '심야의 도강사건'. 지프로 강을 건너던 중 별안간 엔진이 꺼져버렸다. 평소 군인정신으로 완전무장한 그였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하필 강 한가운데서 멈춰섰으니 최소한 차에서 내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봉변이었다.

불안에 떠는 뒷좌석의 손님들을 태운 채 진땀을 흘리며 어찌어찌 강 바깥으로 차를 몰고나가는데 걸린 시간이 약 여섯시간. 겨우 강을 벗어나자마자 자동차는 완전히 퍼져버려 견인차를 불러야 했다. 또다른 어느 날엔 눈길에 미끄러져 자동차가 통째로 뒤집힌 일도 있다.

말 그대로 전복사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안전벨트를 맨 채 너나 없이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모습이 아직도 아찔하다. 그같은 위험 때문에 배운 것이 차량정비 2급 기능사와 응급의료처치법. 그후 웬만한 자동차 고장과 응급처치는 직접 막아낸다.


오지여행은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쾌감

전국의 오지란 오지는 들러보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굳이 잘 닦인 관광지를 놔두고 고생길만 자처하냐고 곧잘 사람들이 묻지만 거친 길,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오지여행은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그에게 쾌감이다.

비포장길에서 만나는 야생의 산과 들, 벌레와 새, 그리고 해맑은 사람들. 아무리 낯선 객이라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는 오지사람들이다. 변변찮은 밥상이라도 식사는 물론 날 저물면 자고 가라고 소매를 붙드는 인정이 그들에겐 살아있다.

"하지만 사업으론 제로였습니다. 도무지 수익이 나지 않으니까요. 우선 일의 특성상 주말 밖에 못 다니니 일거리라곤 한달에 많아야 네 번, 그나마 회비라고 받은 돈에서 기본경비 빼고 조금 남는 돈도 매번 자동차 수리비로 다 쏟아부었거든요.

안그래도 중고차라 낡고 불안한데 가는 곳마다 전부 험한 곳뿐이니 금새 망가지는거죠. 그러다 어느 날인가 정선에 갔다가 눈길에 차가 뒤집히면서 완전히 찌그러져버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참 어렵고 아슬아슬하게 사업을 끌고간 거였는데 그 일까지 당하자 '아, 여기서 끝나는구나. 이젠 이 일을 그만두라는거구나'는 생각에 너무도 암담했습니다.

견인차를 불러다 정비소에 수리를 맡겼는데 수리비 100만원을 구하지 못해서 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고비는 많았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1주일간 산에 틀어박혔다. 뭔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결론도 못 얻은채 돌아온 그에게 뜻밖의 구세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박씨가 근무하는 트랙코리아의 대표이자 치과의사 이승건씨를 만난 것.

역시 오지여행에 심취해있던 이씨가 본격적인 오지전문여행사를 계획하면서 박씨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트랙코리아에서 몇 년간 근무한뒤 잠시 독립해 나갔다가 또한번 실패를 겪고 한 해외여행전문업체에 합류했는데 최근 그곳이 다시 이씨의 트랙코리아와 합병되는 우연 아닌 우연을 겪으면서 그는 다시금 트랙코리아의 멤버로 원위치했다.

"정말 인생은 돌고도는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여행이든 뭐든 나는 내 힘으로 혼자 해보겠다는 똥고집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은 절대 혼자만으로 살아가는게 아니란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지금의 회사에 우연찮게 돌아온 경위도 그렇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도 신기한 우연처럼 재회하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그래서라도 더 성실하게, 죄 짓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낯선 길에 대한 유별난 호기심 때문에 남모르는 낭패도 많았다. 결혼전 현재의 아내와 데이트할 땐 좋은 곳을 보여준답시고 걸핏하면 인적 드물고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다가 이상한 오해를 받은 일도 여러번.

길을 지나다가도 처음 보는 길이 눈에 띄면 호기심을 못이겨 무작정 삼천포로 빠졌다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신혼여행도 오지에서 보냈다. 예의상 첫날만 호텔에서 묵은 뒤 태백에서 진해까지의 '지옥코스'를 돌며 신부에게 남다른 고생담을 만들어준 '오지의 투사' 박씨. 현재 아들 형제를 둔 가장인 그는 앞으로도 적당한 때만 오면 산속에 깃들어 그 자신이 오지마을 사람으로 사는 것이 꿈이자 계획이다.


가장 큰 재산은 함께 떠나는 사람들

그에게 가장 큰 재산은 역시 사람이다. 번잡스러운 세상살이 속에서도 박씨처럼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지난 6년간 쌓인 인연이 많다.

요즘도 매주 주말이면 10~20명의 여행객과 더불어 오지여행을 떠나는 박씨. 대개 20~30대 독신의 여성이 신청자의 주종을 이루지만 한편으론 한국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생면부지로 떠났다가도 직접 물을 긷고 밥을 끓여먹으며 고생을 나누는 사이 돌아올 즈음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로 뭉치는 우정도 이들이 갖는 또다른 소득이다. 오지마을 주민에게도 박씨는 이미 친근한 얼굴.

개중엔 오직 세계일주의 꿈을 위해 북한을 탈출해 정선의 한 골짜기에서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귀순자 이영광씨 등 남다른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의 오지는 이미 오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예전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 얼마전 오지중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하여 박씨가 찾아갔던 한 산골마을이 그랬다.

높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데 배를 두번이나 갈아타야할 만큼 깊이 고립된 두메산골인데도 집의 부엌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으리으리한 대형냉장고와 TV 등 갖가지 신형 가전제품. 금속성 문명의 입김은 벽지산간 이름모를 이웃들에게도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게 현실이지요. 그분들 입장에서보면 어쨌든 생활이 너무 불편하니까 갈수록 도시사람처럼 편리한 생활을 원할 수 밖에 없는거지요. 우리 욕심만 가지고 뭐라 강요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쉬운 마음이야 들지만."

주말을 평일처럼, 평일을 주말처럼 살아가는 오지탐사맨 박노익. 그는 이번 주말에도 서울에 없다. 양양의 부연동, 인제의 아침갈이와 설피밭, 삼척의 덕풍마을 등 지금까지 직접 발굴해 낸 명소도 여러곳.

이번엔 또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의 30대답지 않은 박씨의 발자국은 오늘도 산으로, 바다로, 자꾸만 서울을 달아난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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