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애니메이션] 러시아 혁명의 잿빛 사회상 묘사한 수작

■이비쿠스

파스칼 라바테 지음, 이재형 옮김

만화가 일반 서적과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누가 뭐래도 그림이다.

만화에서 그림은 전체 작품 분위기를 만들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다.

복잡한 사상과 이론, 난삽한 글로 채워진 만화는 '볼 것'을 기대하는 만화 독자들을 피곤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만화로 된 이론서나 사상서, 철학서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파스칼 라바테의 '이비쿠스'(현실문화연구 펴냄)는 만화 같지 않은 그림으로 만화의 특성을 살린 수작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윤곽 선이 뚜렷하지 않은 회색 톤의 그림, 무중력 상태에 있는 듯 일그러진 인물 표정들, 절제된 대사 등은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있던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시절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작가 라바테는 담채(淡彩)와 아크릴 기법을 절묘하게 혼합함으로써 이야기 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표현주의적 화풍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식량부족과 내전, 사상과 질서의 아노미 현상에 처해 있는 모스크바 길거리의 공포와 혼돈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특히 딥포커스, 대프레이밍, 숏, 역숏 장면 연결 등은 영화에서 배운 기법을 그대로 적용해 효과를 보고 있다.

이 작품은 2000년 앙굴렘 국제 만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걸작이다. 작가 라바테는 1993년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원작을 발견, 3프랑을 주고 산 뒤 이런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다. 원작은 1926년 러시아에서 발간된 책으로 알렉시스 톨스토이가 쓴 것이다.

주인공인 하급 회계 사무원 시메온이 혼란의 러시아 시절 우연히 알게 된 골동품 수집상의 돈을 훔쳐 일약 거부가 된 뒤 향락과 쾌락으로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생략과 암시, 묘사, 괴기함 같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등장 인물 눈매의 예리함과 흑백의 대조가 이루는 회색 풍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일반 만화가 갖지 못하는 묘한 느낌을 전해준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1/03 20:35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