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뇌성마비 장애인 최초의 서울대 졸업생 정훈기(上)

나이드신 어른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도 이젠 스물여섯. 나이를 먹고보니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게 많다. 이런 인터뷰만 해도 그렇다. 수년전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뇌성마비 장애인, 최초의 서울대 입학생'이라며 많은 분이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그땐 전연 거리낌없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다 말했지만 요즘은 한 질문 한 질문 대답을 할 때마다 지금 내 대답이 기사화됐을 때 다른 장애인에게 행여 어떤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한번 더 생각하고 걸러서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렸을 때 이러저렇게 공부했다는 얘기만 해도 후배 장애인에겐 그 가족이나 주위사람들로부터 "봐라, 정훈기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했다"든가 "저 형은 저런데 너는 왜 못하냐"는 소리를 듣게 할 수 있다는 거다.

나를 인간승리의 주인공처럼 다루지 말았으면 좋겠다. 장애, 비장애를 떠나서 사람마다 모두 다르듯이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만 봐주었으면 좋겠다.


특별할것 없어 나를 대한 기족들

1974년 겨울 나는 태어났다. 탯줄을 자르면서 뇌에 산소공급이 제대로 안 돼 신경세포들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한다. 꼼짝도 하지않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4시간만에 기적적으로 숨을 내쉬는걸 보고 다들 안도했다고 했다.

그러나 서너살이 되도록 입이 떼이지 않자 부모님은 나를 병원에 데려갔고, 그때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조금만 힘들면 목이 심하게 뻣뻣해지고, 다리가 불편해 오래 걷거나 서 있기가 어렵다는 것, 손가락이 곱아 정교한 수작업은 빨리 할 수 없다는 것, 말을 하는데 다소 불편과 시간이 따른다는 것, 나는 오래도록 이런 불편함에 익숙해져왔다.

어려서부터 대가족이 북적대는 집안에서 자란건 차라리 내게 좋은 환경이었던 것 같다. 그리 넉넉했던 가정형편은 아니지만 뭣보다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함께 살던 10대 나이의 외삼촌과 이모는 특히 나와 막역했다.

내 몸에 장애가 있건말건 거리낌없이 나를 대하며 걸핏하면 내게 레슬링 시합을 걸어 이기고는 좋아라 했다. 개구쟁이였던 나도 어떻게하면 그들에게 한판 복수를 할까 호시탐탐 기습의 기회만 엿보던, 평범한 장난꾸러기였다. 어머니도 말리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을 위해 늘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실 뿐, 다른 가족과 함께 뒹굴며 자라도록 놔두셨다. 사실 일반 사람이 장애인을 대할 때 지나칠만큼 조심스러워하고 피하는 것도 오히려 서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점점 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당신과 별 다를게 없다.

일상생활 능력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초등학교 취학전 일반학교에 갈 것인가, 특수학교에 갈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 병원에서 지능검사를 받을 땐 '다음 사람그림 중 빠진 부분을 그려넣으라'는 테스트 항목에 심지어 젖꼭지 점까지 챙겨 그린 나를 보고 의사가 유쾌하게 웃었다고 했다.

만약 내가 보통 사람과 격리된 특수학교에 다녔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어머니가 나를 일반학교에 넣어준 건 여러가지 면에서 참으로 고맙고도 현명한 판단이셨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때 학교까지 데려다주시고 방과후엔 데리러오시곤 하셨는데, 데려다준 뒤 곧장 집으로 가신줄 알았던 어머니가 그 뒤에도 몰래 우리 교실 담벼락 유리창문 옆에 숨어서 내가 수업받는 모습을 지켜보셨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신체장애는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내가 다른 친구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곤 아이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어쨌든 내가 그들을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난 운동장 조회 때 한번도 다리의 고통을 이유로 잠시 앉아있게 해달라고 해보지 않았다. 조금만 서 있어도 다리가 뒤틀리도록 아팠지만 내가 전체에 맞춰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보다못한 선생님들이 먼저 달려와 나를 앉힌 적이 몇번 있을 뿐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눈치를 배운거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장애인의 현실은 얼마나 온당치못한가.

어쨌든 공부도 그럭저럭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툭툭 주먹 장난질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난 장난기가 많았다. 공부를 잘 한 것도 어떻게 보면 '잔꾀의 왕자'라서 그렇다. 선생님이 뭔가 숙제를 내면 그걸 곧이곧대로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빨리 그 숙제를 해결할까, 그런 궁리부터 했다.

초등학교 땐 같은 숫자를 두개, 세개, 네개씩 각각 더해서 답을 적어오란 숙제를 받고는 그 단순계산 대신 커다란 종이를 펴놓고 도표를 그려본 적도 있다.

어른이 보는 신문에서 한자도 즐겨보았다. 말로 여러마디 설명하는 것보다 한자 하나만 쓰면 금방 뜻이 통할테니 그만큼 노력과 시간절약하기 좋은 글자가 어디 있나. 더구나 나처럼 언어생활이 불편할땐 더욱 말이다.


친구들과 말 트기위해 시작한 공부

중학교 입학 직후엔 단 이틀이었지만 부반장을 맡았던 적도 있다. 사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매번 선거 때마다 단골로 오르는 반장후보였다.

그러나 지지율이 낮아 반장자리는 늘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배치고사에서 학급석차 2위로 입학하면서 마침내 불문율처럼 돼있는 부반장 감투를 실제로 쓰게 됐다. 차렷 경례 구령까지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이틀째 되던 날, 선생님은 갑자기 "나와 동점자가 있다"라며 "정말 잘 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 포기하라"며 아이들 앞에서 강요하다시피 물었다.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힘없이 대답하자 목소리가 작다며 선생님은 더 큰소리로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외치게 했다.

주위에선 "넌 공부 밖에 없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들 위로했다. 사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친구들과 말을 트기 위한 방법으로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공부 자체도 내겐 재미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도 점점 더 좋아졌다. 잘 안 풀리는 수학문제도 며칠내내 도를 닦듯 끈질기게 풀어보고 또 풀어보다가 마침내 해결해냈을 땐 답을 얻을 때의 짜릿함이 있다.

나의 공부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도 나는 안다. 불편한 몸으로 당장 노트필기는 어떻게 따라갔냐는 것. 내 잔꾀가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다.

즉석에서 선생님의 수업내용을 다 받아적을 수 없으니 미리 우리 반보다 더 빨리 진도가 나간 반을 찾아 그 노트를 빌려다 집에서 다 베껴두었다. 그리고 수업중엔 보충할 부분만 더 채워넣으면 됐다.

그럴 때도 한글, 영어, 한자, 기호 등을 있는 대로 다 동원해서 최대한 짧게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암호와도 같은 표시를 알아먹을 수 있는건 나 뿐이었다.

어떨 땐 너무 황급히 적다보니 내 손으로 쓴 암호를 내가 풀지못해 결국 옆자리 친구의 공책을 빌려서 대조해보며 겨우 해독하는 일도 많았다. 이 필기법은 대학 때도 유용하게 썼다.

체육시간엔 늘 열외였다. 혼자 덩그라니 앉아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했고, 고등학교 땐 체육수업 대신 전원 자율학습을 하는 입시위주 교육 때문에 오히려 덕을 봤다.

더이상 체육시간의 외톨이가 될 필요가 없었다. 대입시험에선 다른 학생의 체력장 평균점수를 내 점수로 반영받았고, 재수를 하던 해엔 체력장 자체가 폐지되면서 완전히 해방됐다.

첫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은, 이해할 지 모르겠지만 시험장 책상 때문이었다. 시험을 치러 가보니 손바닥만한 크기에다 약간의 경사까지 있는, 대학생용의 책상이 나와있었다.

아주 당황했다. 평소 손가락이 불편한데다 원래 시험지를 넓게 펴놓고 시험을 보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 불편한 책상에서 시험을 보다말고 수시로 시험지를 놓쳐 떨어뜨리는 등 모든게 엉망진창이었다. 완전히 페이스를 잃고 시험은 실패.

그래서 재수하면서 두번째 입시를 치르러 갔을 땐 가장 먼저 점검한 것도 책상이었다. 시험을 보는 학교측에 큰 책상을 달라고 부탁했더니 아예 큼지막한 구내식당 식탁을 가져다주었다. 입시 두번 만에 나는 대학생이 됐다.


원치않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고통

'뇌성마비장애인, 최초의 서울대 입학생'. 1994년 입학과 함께 내게로 쏟아지던 사람들의 눈길은 참으로 요란했다.

몰려든 취재진의 인간승리식 보도로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은 입지전적 인물이 됐다. 하지만 진짜 내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대학생활 4년 내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괴로움이 따랐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했다.

그때까진 대학입학이라는 목표점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저 그것을 향해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됐다. 그러나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시점에서 더이상 또 어떤 목표점을 향해 살아야하는건지, 마치 갑자기 방향지시등이 꺼져버린 어둠속의 미아처럼 혼란스러웠다.

수업을 받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까지 갈 일부터 머리를 짓눌렀고, 학교에 간신히 도착하고나면 다시 돌아갈 걱정 때문에 온 신경이 말랐다.

정신이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 정문에서 20-30분씩 걸어들어가야 겨우 만나는 강의실, 첫 강의를 받고나면 다음 강의실을 찾기위해 쉬는 시간 내내 아픈 다리로 죽어라 뛰어야 했다.

보통 학생도 분주히 움직여야 할 일인데 다리가 약한 내겐 너무나 무리였다. 처음엔 멋모르고 원하는 과목대로 수강신청을 했다가 막상 수업을 들으려고 가보니 들쭉날쭉 멀리 흩어져있는 강의실.

그중 하나는 한참 위쪽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걸 알고 아연실색했다. 그 때문에 다음 학기부터는 과목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이동거리가 짧은 강의실의 과목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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