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대문구 연희동(延禧洞)

연희동은 본디 1914년 4월1일 일제가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옛 북부 연희방의 궁둥(宮洞), 음월동(陰月洞), 정자동(亭子洞), 염동(廉洞) 등을 병합, 옛 연희궁(延禧宮)의 이름을 따 '연희리'라 함에 따라 그 이름이 생겨났다.

연희리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입되었다가 역시 일제 때인 1936년 4월1일 경성부의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일본식의 땅이름 방식을 따 '연희정'(延禧町)이라 하였다. 광복 뒤인 1946년 10월1일, 일제가 만든 '찌꺼기 땅이름'을 정리할 때 연희동(延禧洞)으로 고쳐졌다.

연희동에는 옛 연희궁 터가 있고, 인근에는 6ㆍ25 때 서울 수복의 결전장이었던 연희고지(104고지)가 있다. 고지 동남쪽 기슭, 곧 염비 뒤에 우뚝 솟은 바위에 '104고지 전첩기공비'(104高地 戰捷紀功碑) 10자를 새기고 그 밑 구리판에다 사적을 쓰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연희동의 이름은 조선조 때 연희궁(延禧宮)이 있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제2대 임금 정종(定宗)이 그 아우 태종(太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잠시 있었으며, 제4대 세종(世宗)대왕도 재위 8년(1426년)에 이 궁에 옮겨와 있다가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 뒤 누에(蠶)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동잠실과 남잠실을, 그리고 이곳에 서잠실을 두었다.

또 1505년 연산군이 이 연희궁을 다시 꾸며 놀이터를 삼고 날이면 날마다 질탕하게 놀았던 곳이다. 얼마나 그 놀이가 방탕했던지 참외 수박을 산더미처럼 버려서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와 몇날 며칠을 파먹는 바람에 '연희궁 까마귀 골 수박 파먹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던 세월은 흘러 조금 떨어진 북아현3동과 함께 연희동은 서울에서 고급 주택가로 손꼽히면서 고급 장교나 재계 인사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북아현3동은 정부기관의 고위관리들이 일찍부터 터를 잡았던 곳.

특히 제5공화국을 만든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사저도 이 연희동에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제6공화국의 노태우(盧泰禹) 전 대통령의 사저도 전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 연희동은 대통령이 둘씩이나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 연희궁 터의 발복"이라며 이야기의 소재로 삼곤 했다.

한편 '한국 지명의 신비'를 쓴 김기빈씨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제5, 6공화국 당시 전 대통령 친인척들의 온갖 이권개입과 부정, 그리고 전 대통령의 수천억원의 비리자금 모금은 연산군 때 '연희궁 까마귀 수박 파먹듯 했다'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또 곳곳에 잠실을 설치했던 세종임금과 잠실에 올림픽을 유치했던 전직 대통령을 역사에 비유, 생각케 한다. 더구나 1988년 하반기에 대학생들과 재야단체에서 '전ㆍ이 부부 체포결사대'를 조직, 이곳의 대통령 사저를 경비하는 전투경찰대와 서로 밀고 밀리던 정황은 6ㆍ25 당시 서울 수복의 결전장으로 이곳 연희고지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을 떠올리게 하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1/0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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