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44)] 이지디지탈 이영남 사장(上)

"사장하기 힘드냐고요? 힘들죠. 남자들과는 다르니까요. 남자 세계에는 학연이나 지연, 이런 것을 따져 특수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여사장은 그럴 수 없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으면 안돼요. 통찰력도 갖추고, 능력도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계측기 제조업체에서 통신네트워크 장비업체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이지디지탈의 이영남 사장은 여성 CEO(최고경영인)의 첫번째 덕목으로 존경받는 경영능력을 들었다.

사회 곳곳에서 정도(正道)가 아닌 꼼수가 판치고 있는 세태를 향한 따끔한 일침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벤처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사장님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금언으로도 들린다.

벤처업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CEO의 한 사람인 그녀는 그같은 기준에 어느 정도 부합할까.

우선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이 사장은 1999년 9월 LG정밀의 범용계측기 사업부를 인수했다. 중소 제조업체가 대기업의 사업부를 인수했다는 소식에 당시 벤처업계에서는 "이영남 사장이 누구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당연히 질시의 눈초리도 있었고 진정으로 이 사장을 위하는 사람들은 단 한번의 위험한 도박에 그녀가 모든 것을 잃을까봐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LG 사업부를 인수할 때 자금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어요. 또 사업권과 함께 25명의 인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대기업 출신 인력은 중소기업적인 환경에 못 견디고 기존 인력은 그 나름대로 불만을 갖고 있다가 하나둘 빠져나가면 기업 자체가 망한다는 거죠."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여성 특유의 온화함과 편안함으로 두 조직의 조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LG측도 IMF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오실로스코프 등 정밀계측기 분야를 양도했지만 끝까지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이지디지탈은 계측기 분야에서 다양한 제품군을 보유하게 됐다. "좁지만 깊게 아는 대기업 인재들과 얕지만 넓게 아는 기존 인력과의 시너지를 창출했다고 자부합니다. LG측에서도 이지디지탈로 옮긴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들었습니다"고 그녀는 지금도 만족해한다.

이 사장은 또 11년 전통을 지닌 중소제조업체인 서현전자를 2000년 초부터 첨단 벤처기업 이지디지탈로 과감히 바꿨다. 이 시도 역시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강력한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거둔 성과다. 또한 미국의 통신장비업체인 ADC텔레커뮤니케이션즈사와 기술이전 및 마케팅에 관한 전략적 제휴관계를 체결하고 2000년 3월에는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1,200만 달러)을 해외에서 끌어왔다.

매출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보다 100억원 가까이 증가한 240억원(잠정치)대. 주력제품인 아날로그 오실로스코프는 9%의 세계시장 점유율(3위권)을 자랑하고, 디지털분야에서는 아시아 정상이다. 뒤늦게 시작한 LAN장비, 스위칭, 라우터 등 통신부문의 매출도 내수 30억원대를 넘어섰다.

과감한 투자와 변신, 그리고 성공. 이영남 사장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여성 CEO의 자리를 굳혔다. 주변에서는 프로젝트마다 성공으로 이끄는 그녀를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여성 CEO'라고 부른다. 그녀의 탁월한 능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장사꾼 기질은 천성적으로 타고났다"는게 그녀의 설명이다. "초등학교때 부반장을 맡았는데 스승의 날이 왔어요. 학급마다 서로 경쟁적으로 무슨 행사를 만들잖아요. 그때 교장선생님을 우리 학급으로 모셔온게 바로 저였어요. 그런 일에는 무슨 끼 같은게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성공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혹독한 과정을 겪었다. 경영자로서의 그녀의 삶은 '온실'에서 큰 화초가 아니라 '들판'에서 자란 잡초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이지디지탈의 전신인 서현전자의 창업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장은 당시 광덕물산의 영업부에서 6년째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광덕물산은 1970~1980년대 섬유, 전자, 모피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중견그룹.

광덕물산의 조석훈 회장이 이 사장의 끼에 반해 직접 중매도 서고 사업가로 키웠다. 광덕물산의 전자사업부가 서현전자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이 사장은 "이 세상에 산업이 존재하는 한 계측기도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측기 사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계측기의 90%가 수입품이므로 반드시 원천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녀는 회사 창립 후 3년간 가시밭길을 걸었다. 주문자상표 부착 생산방식(OEM)으로 산업용 공장이나 연구소, 공과대학에서 사용하는 범용계측기를 생산했지만 그녀에겐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근근히 버텨가던 그녀에게 1994년은 잊지 못할 해다. 엄청난 시련과 기회를 함께 안겨준 시기였다. 그해 초 생산물량을 소화해주던 광덕물산이 부도가 났다.

하청공장으로선 모기업이 죽으면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의리파 이 사장이지만 끝까지 절망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기업인으로 성장하느냐, 남의 파출부가 되느냐는 각오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광덕물산 정도의 규모이면 서현전자와 같은 하청업체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살려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문제는 모기업이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달렸지요.

많은 하청업체들이 나름대로 접대도 하고 줄도 댔을 것 아닙니까? 여자가 술대접을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학연 지연이 있나요. 그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들겼습니다." 하늘이 도와준 것일까. 한달 만에 광덕물산측이 L/C를 T/T로 포워드(넘겨)해주었다.

마음의 문을 두들겨 구축한 휴먼네트워크의 결과였다.

그녀가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것은 다시 일어선 뒤. 에어컨용 컨트롤러(전자제어기기) 제조에 손을 대면서부터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에어컨 붐이 불었기 때문이다. <계속>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1/0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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