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미스터리 전쟁

전쟁에는 발생에서 끝난 뒤까지, 언제나 미스터리가 남는다. 역사 속에서 여러 전쟁의 원인이, 그리고 그 결과가 해답을 주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국제정치학, 세계정치학, 지정학 등은 역사가들의 연구에서 시작되고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자들은 역사가로 불린다.

워싱턴포스트의 13일자 'No Gun Ri 유감'이란 사설에서 "클린턴 정부가 노근리 사건을 '전면적 사과' 대신 '유감'이라고 표현한 것은 진솔한 행위가 아니다"라고 요약했다.

이번 조사에 자문관으로 참가했던 예비역 해병중장 버너드 트레이너는 "이번 사건에서 최악의 경우 사살을 명령한, 최소한의 경우 부대지휘에 실패한 미군 지휘관들은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사건의 한국측 자문위원이었던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한국사)는 "조사가 시작되면서 미 육군장관 칼델라가 '전쟁범죄자는 시한에 관게없이 면책할 수 없다'고 공언한 이후 참전자들의 증언 회피ㆍ번복이 빈발해 진실파악에 애로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런 평을 보면서 200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3자중 1명 탈락-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과 한국전쟁의 원인'을 펴낸 리처드 설톤 박사(죠지워싱턴대 역사 및 국제정치학 교수)를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적지않은 서평자들은 설톤 박사를 '전쟁을 해부하는 미스터리 역사학자', '탐정 같은 국제정치학자'라고 평한다. 그가 쓴 '포클랜드 전쟁', '닉슨-키신저 시대의 외교'가 탐정소설을 쓰듯, 심리적 수사소설을 쓰듯 전쟁과 외교정책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설톤 박사는 한국전쟁 50주년을 앞두고 공개된 러시아 중국 미국의 외교문서와 극비전문들을 셜록 홈즈의 확대경과 추리력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혔다.

그것은 톰 클랜시의 스릴러나 안토니 프라이스의 미스터리 소설 같은 전쟁연구서였고 미ㆍ소냉전의 탐사적 분석이었다. 그가 추리한 결론은 환상적이나 괴기한 것이 아니다. 추측이나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을 밝히기 위한 수사적 추적이다.

설톤 박사는 수백종의 책이 규명하지 못한 한국전쟁의 미스터리를 풀었다.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김일성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야심 하나만으로 스탈린을 '우리 민족과 나의 위대한 스승'이라며 따랐다. 전쟁을 계획한 것도, 그가 죽기전까지 끌게 하고 중국 인민군을 의용군으로 참전시키고 휴전까지 가게 한 것은 모두 스탈린의 계획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탈린은 1949년 중공의 마오쩌둥이 대륙을 공산화하자 중공과 미국의 화해를 악몽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순회대사인 필립 제섭을 통해 홍콩에서 타이완을 내주며 미ㆍ중공 간의 연계를 맺는 비밀협상을 중공과 벌였다. 스탈린은 이때 마오쩌둥과 주언라이를 모스크바에 초청해 중국과의 우의동맹, 만주에서의 소련군 철군, 대련ㆍ여순항의 양여문제 등을 협의하며 미국과의 관계증진을 견제했다.

스탈린은 1950년 1월30일 마오쩌둥과의 우의조약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스티코프 주평양대사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오도록 전문을 보냈다.

미국이 타이완을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망에서 제외하고 중공의 유엔 회원국 부여문제에 유연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타이완 때문에 미국과 연계되는 것을 막는 장치로 김일성의 남침이 절대 필요했다.

김일성은 박헌영 외무장관과 모스크바에 와 3월30일부터 4월30일까지 머물렀다. 스탈린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새로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보냈고 이들은 '선제타격의 남침계획'을 짰다. 스탈린은 "인민이란 양과 같다. 숫양이 가자면 따른다"며 "남쪽을 공격하면 남쪽 인민이 봉기할 것"이라고 김일성을 격려했다. 김일성이 마오쪄둥에게 남침을 알린 것은 5월13일이었다.

이때 마오쩌둥은 타이완 상륙을 위한 스탈린의 공군 및 함정지원을 기다리며 타이완 양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6월25일 일요일, 장마가 시작되더라도 이날 전면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선제공격의 기회를 빼앗기고 타이완을 포기해야 했다.

설톤 박사의 결론은 결국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세 사람이 던진 동전은 마오쩌둥을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중국은 1972년 닉슨과 화해할 때까지 20여년간 소련의 영향 아래 있어야 했다. 노근리 사건의 미스터리도 설톤 박사가 해답을 주었으면 한다.

박용배 세종대 겸임교수

입력시간 2001/01/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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