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소설이 영화로 바뀔 때

'좋은 소설이 없다' '영화가 이야기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둘 다 맞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소설이 없다. 모두 일상과 자의식으로 숨어버렸다.

오죽하면 '파이란' 처럼 일본까지 건너가 그곳 소설을 사왔을까. 영화 역시 거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서사구조가 무너졌다. 일상의 에피소드를 잘 포착하고, 그것을 세련된 영상으로 담으면 '신세대 감각' 의 영화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베스트셀러 소설은 언제나 있다.

굳이 소설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고도 '박하사탕' 같은 시대와 현실을 담은 서사영화도 나온다. 영화에서 베스트 셀러 소설이 '흥행의 안전판' '이야기의 샘' 역할을 못한지는 오래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최인호 박범신의 소설은 영화에서도 곧 '절반의 성공' 을 따놓고 시작할 수 있는 재료였다. 소설의 재미를 영화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것이 1990년대에는 '성'으로만 좁혀졌다. '경마장 가는 길' '거짓말' 들만 유행했다. 100만 독자를 울렸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태백산맥' '아버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도 영화로 바뀌었을 때는 그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이제 더 이상 영화는 소설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이유는 많다. 우선 영상 세대들에게 소설은 관심 밖이다. 옛날 만큼 작가나 작품의 위력이 없다. 그들은 이야기 듣는 것,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무언가 가르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자본도 일조를 했다. 대기업이나 투기자본은 철저히 상업적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의 기호를 분석한 기획상품을 생산한다.

자연히 아이디어를 중시한다. 기획대로 잘 움직이는 신인 감독들을 선호하고, 그들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편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뻔하다. 연륜이 짧고 인생의 경험이 적으니 대부분 자신들이 겪었던 일상을 아기자기하게 표현하는 것이 마치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인양 생각한다.

서사적인 재미보다는 독특한 상황 설정, 스타배우에 의존한 캐릭터로 영화의 재미를 연출하려 한다. 홍콩 왕자웨이, 일본의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향도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의 기피는 '소설보다 나은 영화' '소설과 다른 영화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연출'에 있다. 문자와 영상예술의 차이, 시대 감각을 극복하지 못하는 각색과 연출은 소설 독자에게도, 영화 팬에게도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심지어 '비천무' 처럼 가장 영화에 가까울 수 있는 만화조차도 제대로 영화적 장치로 옮기지 못했다.

그래 놓고 쓸만한 소설이 없다고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영화가 다시 인기 소설을 기웃거리고 있다. 곽재용 감독은 차태현과 전지현을 주연으로 김호식의 PC 통신 소설인 '엽기적인 그녀' 를 원작으로 2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윤인호 감독은 신경숙의 '그가 모르는 장소' 를, 최루성 드라마로 재미를 본 '편지' 의 이정국 감독은 김하인의 멜로소설 '국화꽃 향기' 를 영화로 만든다. 모두 기성 감독들이다. 일상성에 대한 염증과 영화의 서사성에 대한 관객들의 욕구 때문일까.

돈과 테크놀로지의 볼거리에 대한 반발일까. 시나리오와 신인 감독과 아이디어의 빈곤 때문일까. 아니면 감독 스스로 독창적인 소재를 개발하지 못해서 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의미없는 한낱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1/01/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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