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대국' 미국이 더 세진다

NMD 강행으로 신냉정기류 형성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월23일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와 글로리아 마가파갈-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 언제 누구와 통화를 하느냐는 통화 상대국의 비중을 가름하는 중요한 지표여서 전통적인 우방인 일본의 모리 총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로요 대통령과의 통화는 다소 뜻밖이었다.

아로요는 전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퇴임에 따른 혼란과 권력의 공백현상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상태였다. 그래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돕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격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부시 대통령에게도 아로요의 재빠른 권력승계가 두통거리 하나를 제거해주는 결과를 낳았다."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라는 그의 말에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솔직한 심정이 숨어있다. 자칫하면 자신의 취임식이 필리핀 사태로 얼룩질 뻔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 직전 에스트라다가 퇴진을 결정했는데, 만약 에스트라다 세력과 반대세력이 충돌,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군부가 개입하는 불행으로 발전했다면 부시 새 행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입장 표명을 했어야 했다.

미국이 8년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기에 다른 나라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비극이 초래될 뻔한 것이다. 그리고 '강한 미국'을 내세운 부시 새 행정부의 리더십과 위기관리능력이 곧바로 시험대로 오르는 '원치 않는 상태'에 빠질 뻔했다.


강경보수 색채의 새 행정부 출범

지루한 대선 공방전을 거쳐 필리핀의 덫을 무사히 건넌 부시 새 대통령은 1월 20일 성대한 취임식을 갖고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그는 취임사에서 '위대한 미국 건설'을 주창하고, 국민통합과 책임 있는 시민상을 강조했다. 여느 대통령보다 간결하고 압축된 취임사는 그의 강한 정치 노선답게 힘이 있었다는 평가다. 그는 소수파대통령의 태생적 약점을 덮어버리기 위해서 '강한 미국'의 색깔을 버리지 않을 전망이다.

새 행정부의 강성 노선은 인적 구성에서도 두드러진다. 부시 대통령은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국론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민주당 인사를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했지만, 실제로는 '무늬만 거국내각'이라는 평이다.

민주당 인사는 물론, 흑인, 여성, 소수민족 등 당과 피부, 성별을 따지지 않고 초당파적으로 인물을 선택했으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중심축은 역시 강경보수색채다.

얼마 전에 불법 이민자 고용문제로 자진 사임한 차베스 노동장관과 애슈크로프트 법무,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 고 노튼 내무장관 역시 강경 보수로 분류된다. 민주당 출신 노먼 미네타 교통부 장관 지명자도 민주당내 소신파로 알려져 있다.

힘을 바탕으로 한 팍스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부시 행정부의 행동대장은 콜린 파웰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다.

다소 강약은 있지만 모두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공화당 성향의 인물들.

특히 파웰 장관은 1월 17일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새 행정부는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구축을 전속력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탈냉전 후 형성된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를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도록 힘의 우위를 확실히 굳히겠다는 의도다.


"잘못되어도 미국은 살아남겠다"

NMD 등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에는 어느 한나라가 선제 핵공격을 했을 때 보복공격을 받아 서로 망한다는 기존의 '공포의 핵균형'을 끝내겠다는 원대한 구상이 숨어 있다. 지금까지 통용된 '잘못되면 너 죽고 나 죽는'방식이 아니라 '잘못되더라도 나는 살아 남겠다'는 미국의 '기술 이데올로기'가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안보관계 장관들의 취임식에서 '힘의 외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화학 생물 핵무기의 확산과 테러분자들의 컴퓨터 기술 이용 등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위협에는 힘으로 대결할 것"이라면서 "러시아 등이 반대하고 있는 NMD 체제 구축을 공약대로 계속 추진하겠다" 고 거듭 확인했다.

경제정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곧 의회에 1조6,000억 달러의 세금감면 계획을 제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의 감세 계획은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지지 발언으로 강한 추진력을 얻게 됐지만 너무 서두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욕심이 앞서기 마련"이라며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1993년 취임 초부터 '신경제 계획'라는 경기부양책을 도입했으나, 흐지부지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행정부 군기잡기에 나섰다. 집안이 탄탄해야 밖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앤드류 카드 비서실장을 통해 행정부에 내려보낸 공직자들의 도덕성 준수 명령과 청바지 착용금지 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새 행정부의 공직자들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복무지침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으나 백악관내에서 청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명령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청바지 차림을 용인한 클린턴 전 행정부의 자율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엄격하고 딱딱한 겉모습에서 부시 특유의 강성을 찾는 이도 없지 않다.

구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며 힘으로 밀어붙였던 레이건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대목인데, 공교롭게도 레이건은 백악관에서 좀처럼 양복상의도 벗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 중국 주축 전략적 반미연대

하지만 햇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새 행정부의 '강력한 미국 건설'구호에 따른 역풍도 벌써부터 거세게 몰아칠 조짐이다. '힘의 미국'을 뒷받침할 NMD 체제의 구축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주변 강국의 반발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취임 전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러시아가 부패를 척결하고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클린턴 행정부가 유지해온 재정지원을 중단할 것임을 시사하는 부시의 발언에 러시아는 즉각 불쾌감을 표시했다.

러시아는 또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태세다.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최근 "미국이 NMD를 강행할 경우 러시아는 앞으로 10년 동안 군사비를 2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도 NMD에 맞서는 강력한 방어망 구축에 나서겠다는 뜻인데, NMD를 파괴할 수 있는 다탄두 신형 미사일 토폴(Topol)M의 추가 배치에 나섰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서방 언론은 미국과 러시아간의 이런 흐름을 '신냉전 기류''신 군비경쟁'으로 표현하며 우려하고 있다.

미국을 더욱 압박하는 것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중국-인도, 러시아-중국-북한으로 맺어지는 전략적 반미연대다. 러시아-중국-북한이란 '북방 3각편대'는 한반도의 해빙기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의 힘을 보여줘야 하는 곳은 많다.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이라크의 후세인 문제, 길이 보이지 않는 중동평화협상, 발칸반도 사태 등이 미국의 힘을 지켜보고 있다..


'힘의 미국'이끌 경제력이 관건

부시가 주창한 강한 미국은 말로, 군사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은 현재 사상 최장의 호황을 누린 뒤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있다.

이 흐름을 돌려야 하는 책임이 부시 대통령에게 떨어져 있는 셈이다. 가뜩이나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리더십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상황이다. 그의 리더십과 강한 미국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1/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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