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초구 良才洞(말죽거리)

서울 양재동(良才洞) 근처에는 옛날 양재역(말죽거리)을 비롯하여 역삼동(驛三洞) 등 역(驛)과 관련된 땅이름이 많다. 그래서 이 일대를 '역말'(驛村)이라 불렀다.

역은 왕조시대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간 주요 도로에 약 30리마다 말과 역정(驛丁)을 갖추고 메세지를 번갈아 전달, 벼슬아치의 숙식, 진상품 등 수송을 담당했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9년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조선왕조 때에는 나라 안에 538개의 역을 두고 이를 4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역과 비슷한 것으로 '원'(院)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큰길의 요지나 인가가 드문 곳에 나라에서 설치해 지방으로, 또는 중앙으로 출장을 오가는 관리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말하자면 국가에서 경영하는 여각이었다.

이를테면 인덕원, 조치원, 사리원, 장호원 같은 땅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양재역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일원'(逸院)이 있는가 하면 원(院)의 터가 있었다 하여 원지동(院址洞)이라 하는 것도 바로 그 원(院)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역(驛)ㆍ원(院)제도에 따르는 도로망의 기본골격은 '서울-의주', '서울-새재-동래', '서울-영산포', '서울-원산-경흥', '서울-강화', '서울-경주' 등의 6대로(大路)였다. 이것이 오늘날 나라안의 주요 간선도로와 지방도시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늘날 서울 서초구 양재역 지역은 옛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彦州面) 또는 과천군의 일부였는데 1914년 3월1일, 일제의 경기도 구역 확정때 역촌, 말죽거리, 방아다리 동네 등 세 동네를 합해 '역삼'(驛三)이라 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또 오늘날 양재역(지하철 3호선)이 있는 일대를 흔히 '말죽거리'라 하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인조(仁祖) 2년(서기 1624년) 2월8일,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몽진(夢進)가는 길에 황급히 양재역에 이르러 끼니를 때워야했다. 마침 유생 김이(金怡) 등 6, 7명이 급히 팥죽을 쑤워 임금에게 수라상 대신 바쳤다고 한다.

급한 몽진길이라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허겁지겁 다 먹고 과천쪽으로 몽진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임금님이 말 위에서 죽을 드셨다'하여 '말죽거리'라 불리웠다는 얘기다.

조선조에는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어 광주의 낙생, 용인의 구흥, 금령, 죽산의 좌찬, 분행, 음죽의 무극, 안성의 강복, 양성의 가천, 남양의 해문, 수원의청호, 장촉, 동화, 영화의 각 역(驛)을 관할하기도 했다.

인종(仁宗) 원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있은 뒤, 인종이 갑자기 돌아가고 어린 명종(明宗)이 즉위했다. 명종이 나이가 어려 그 어머니 문정황후(文定王后:尹氏)가 섭정을 하면서 윤씨 일가의 횡포가 날로 심해갔다.

명종 2년(1547년) 9월에 부재학 정언각(鄭彦慤)이 딸을 전라도로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나왔다가 벽에 붉은 글씨로 "여자 임금이 위에 있고, 간신이 아래에서 국권을 농락하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가히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랴"라고 쓴 것을 본 선전관이 보고 크게 놀라 임금께 아뢰었다.

이를 본 정순붕(鄭順朋) 등이 "이것은 을사사화의 남은 무리들이 한 것이다"하여 마침내 봉성군(鳳城君),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를 죽이고 이언적(李彦迪),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등 수십명이 귀양을 가게 되니, 이를 두고 정미사화(丁未士禍) 또는 '양재역벽서옥'(良才驛璧書獄)'이라 한다.

어찌되었던 그 양재역 자리의 지하에 '말'이 아닌 '쇠말'(鐵馬:지하철)이 서는 양재역이 생겼으니..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1/3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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