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 코리아]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제2의 인생'사는 안병국씨

오클랜드 지방법원에서 음주운전으로 기소된 한 고객의 변호를 마치고 비탈진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1995년 9월 3일 이곳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하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성경 말씀의 한 구절처럼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나 새로운, 무엇하나 자신할 수 없고 보장되어 있지 않은 미래의 땅 뉴질랜드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다.

무역회사에서 수출이다, 수입이다 하여 무척이나 바쁘던 93년 초 어느날 아내는 이민 설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네왔고, 그 후 우리 부부는 아무 편견없는 답사를 전제로 약 2주간 뉴질랜드를 돌아 보았다. 보다 나은 삶과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게 뉴질랜드행 이민 결정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그로부터 3개월. 봄 날씨라고 하지만 다소 싸늘했던 9월에 우리 가족은 한 모텔에 짐을 풀었다. 우리 가족이 직면한 첫 문제는 언어가 다른 상황에서 하루 하루를 꾸려가기 위한 준비 작업들이었다.

예컨데 장보기, 영어수업을 받기 위한 학교 선택과 현지의 운전면허 취득, 아이의 학교 등록, 집 임대 등등.

언어가 낯설고 문화가 다른 뉴질랜드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혼자'라는 생각, '내 아내와 아이만이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혈육'이라는 점이 뼈속 깊숙이 느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미래는 단순히 장밋빛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소설책 속의 낭만이 아닌, 냉엄한 삶과 매일매일 치열하게 투쟁하고, 극복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처음6개월간의 현지 적응기간에는 랭귀지 스쿨에 다니는 아내와 초등학교에 간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현지인과의 분쟁 보며 새로운 도전

이듬해 에이아이티(AIT)라는 대학기관에서 대학교육을 위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때만 해도 '나는 이 새로운 정착지에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못했다.

그 당시 목격했던 친한 친구와 교민들의 어려움, 그 사회를 알지 못하거나 문화적인 편견과 오해로 빚어지는 현지인과의 분쟁과 마찰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도전에 불타, 오클랜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국내에서조차 엄두를 못했던 내가 이국 땅에서, 그것도 30대의 늦은 나이에 법학을 택한 것은 한 친구의 자동차 사건이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당시 절친한 친구가 사소한 자동차 사고를 내 뉴질랜드 법정에 서게 됐는데, 의사 전달을 제대로 못해 1년 면허정지에 벌금까지 부과당하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고국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무역업을 했던 나로서는 30년간 배워온 나의 모든 경력을 뒤로 하고 생소한 영국법의 전통과 법률 케이스에 근거를 둔 법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영어로. 시험은 차라리 지옥과도 같았다.

지금도 법대 입학 초기에 본 학과 시험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뉴질랜드인들은 대개 A4용지로 20매를 순식간이 쓰고 나갔다. 하지만 영어가 달리는 나는 너무나 긴장한 탓에 답은 알면서도 손이 떨려 10장을 간신히 메웠다. 시험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아는 답을 자신있게 쓰고 마음을 놓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그 때의 긴장은 이제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 어려움은 신앙의 힘과 아내의 정성 어린 내조가 없었더라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다람쥐쳇바퀴 같은 생활. 하루 4시간 정도 자는 것을 제외하면 일주일 내내 법케이스와 책, 그리고 교수의 알아듣기 힘든 법학 강의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문득문득 '내가 왜 이런 고통의 길을 가야하는' 라는 회한을 몰아왔다.

안경과 시계를 벗고 마음 편하게 잠들어 본 적이 없던 그때 아내는 애처러운 듯이 나를 지켜보며 같이 마음 아파하고, 기도로 용기를 주었다.


눈물겨운 길고도 어려운 정착과정

특히 모국어가 영어인 학생들이 부러울 때 마다, 혹은 강의실에서 교수가 하는 농담의 내용은 이해는 하면서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때 느껴야 하는 문화적 차이와, 그로 인한 향수, 내 언어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절실하게 가슴을 때렸다.

거기다 한 과목이라도 실패하면 1년을 다시 이수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은 내가 조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누구나 겪어야 하는 모질고 힘든 준비 과정들이었으리라.

1997년 법대 입학, 그리고 3년 만인 2000년 5월 사법연수를 마치고 나는 현지 법률회사에 취직이 되었고 마침내 오클랜드 고등법원에서 뉴질랜드의 변호사로 임용되는 선서를 할 수 있었다. 그날 나와 아내는 밀려오는 벅찬 감동과 기쁨에 두 손을 꼭잡고 있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아이는 이민 2세대가 됐다. 우리 가족은 낯선 땅 뉴질랜드에서 눈물나는 길고 어려운 준비 과정을 이겨내고,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조국을 떠나 이 땅 뉴질랜드에서 뼈를 묻어야만 하는 한 우리 가족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또다른 준비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사진설명> 변호사 임용식날 가족과 함께. 왼쪽 두번째가 안병국 변호사.

입력시간 2001/02/06 17:3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