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이산가족·전력지원 빅딜 시도, 남측 대북정책 혼란

이산가족 문제해결과 대북 전력지원간의 빅딜이 시작된 것인가.

지난 1월29일부터 31일까지 북측 지역의 금강산 여관에서 진행됐던 제3차 적십자회담을 통해 북측은 이산가족과 전력 협력을 연계시키려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이같은 자세가 가시화할 경우 남한으로서는 발등에 큰 불이 떨어지게 된다.

이번 회담에 참가했던 한 남측 대표는 "북측이 대북 전력지원 등을 논의할 경협 회담과 적십자회담간의 일정을 조율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며 "북측이 이산가족과 전력 지원의 빅딜을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회담 중 북측 관계자들은 남측 상황실 요원 등에게 수차례에 걸쳐 "우리는 전기문제가 급하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4차 장관급 회담에서 전력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기 앞서 2, 3차 장관급 회담을 통해 미리 흘린 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물론 북측 대표단은 3차 적십자 회담 공식석상에서 전력에 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고 남측 대표단이 전했다.


북측 "우리는 전기문제가 시급하다"

빅딜의 추진을 예고하는 북측의 자세는 면회소 설치 가동시기에 관한 북측 입장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북측은 "8월15일부터 금강산에 면회소를 가동하자"고 밝혔다. "왜 8월15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면회소 건물을 남북이 공동으로 신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담이 진행됐던 금강산 여관 등 금강산 지역내의 기존 시설을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측의 설명은 대단히 궁색하다.

8월15일을 면회소 가동시기로 잡은 것은 경협 추진위의 경과를 살펴본 뒤 면회소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지난해 말 남북은 경협추진위를 열어 올 상반기 남북 전력 협력을 위해 남북 공동으로 북한 전력실태를 조사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늦어도 4~5월까지 공동조사를 마치고 8월 이전까지 전력협력에 대한 남측으로부터 확답을 받겠다는 게 북측의 구상인 것 같다.

이같은 북측 전략은 이산가족 문제가 북한이 지닌 유일한 지렛대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모든 경제적 자원이 고갈된 북측 입장에서 큰 소리칠 수 있는 사안은 이 문제 뿐이다. 이 카드를 헐값에 팔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같은 배경에서 남측은 8월15일 금강산 면회소를 가동하겠다는 북측의 제의에 무게를 둘 수 없는 형편이다. 남측 회담 관계자는 "사실 분단 반세기 동안 면회소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광복절부터 면회소를 가동하겠다는 북측의 제안을 못받을 이유도 없다"며 "하지만 면회소에 대한 북측의 진의를 헤아릴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돌려 생각하면 설사 이번에 북측 카드를 수용했더라도 광복절 때부터 면회소가 가동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북측의 태도가 이같이 드러나자 통일부 등 대북 정책 부서들은 바싹 긴장하고 있다. 올해 대북 협상 구도가 일거에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북전력 문제를 한반도 평화와 빅딜하는 협상구도를 그려왔다.

수백억~수천억원의 재원이 소요되는 대북 전력 지원은 재래식 전력 재배치 등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 등과 맞물려 진행돼야만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재규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2001년도 재외공관장 회의 강연을 통해 "올해에는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 설치 등 긴장완화 조치를 이끌어내고 남북이 당사자가 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밝힌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남측 입장에서 이산가족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도주의적 문제이고, 남북 정상회담이후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에 맞춰 진전될 수 있는 현안이다. 남측의 이러한 기대는 이번 회담을 계기로 현실적 근거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이 재차 입증됐다. 북측에게 이산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현안이고, 협상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카드에 불과하다.


2차 정상회담등과 관련 정부 큰 부담

이에 따라 남측은 대비책 마련에 부심중이다. 우선 정부는 북한이 노골적으로 전력과 이산문제를 연계시키기보다는 경협추진위의 협상 결과를 지켜보면서 이산가족 문제의 진전을 가늠하는 '사실상의 연계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명분상 노골적인 연계는 비난받을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측의 입장은 남북간 현안 전반과 이산가족 문제를 함께 다뤄왔던 장관급 회담에서 북측의 태도가 보다 가시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올 3월 남측지역에서 열릴 5차 장관급 회담이 면회소 등 이산가족문제 제도적 해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더욱이 5차 장관급 회담은 2차 남북 정상회담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사실 여기에 정부의 더 깊은 고민이 있다. 즉, 전력문제가 단지 이산가족 문제와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2차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따른 것으로 어떠한 전제조건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북측이 김 국방위원장의 답방에 따른 명분과 실리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력문제, 이산가족 문제,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 군사적 긴장완화 등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는 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풀리듯 함께 해소돼야 하는 사안인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은 김 국방위원장이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명쾌히 정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우리측은 5차 장관급 회담을 통해 면회소 설치 문제가 지난해 6월1차 적십자회담의 합의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을 합의해준 1차 회담에서 면회소 문제가 정리된 만큼 다른 사안과의 연계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북측에 주지시킨다는 얘기다.

또 남측 정서상 이산가족 문제와 경협의 연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황도 설명하겠다는 입장이다. 북측은 이산가족 문제해결 등을 통해 남측 정서를 어루만지지 않고서는 원활한 경협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남측의 논리가 북측에 의해 수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듯하다.


체제 생존 위한 실리 극대화전략 드러나

한편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와 생사확인 및 서신교환 확대에 대해 완고한 북측의 입장이 재확인된 이번 적십자회담은 최근 북한식 '신사고'의 본질을 다시 한번 음미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김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계기로 수면위로 떠오른 대외 개방태도, '새로운 관점'을 강조하는 대내적인 분위기 등을 총칭하는 신사고는 '생존 전략'과 동의어인 것으로 보인다.

백방으로 생존할 방도를 찾다 이번에 신사고라는 카드를 꺼내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남관계에서도 체제 생존을 위해 실리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구사될 것이다. 또 예전처럼 막무가내식 협상 태도는 상당부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남측이 희망하는 북측의 협상자세는 섣불리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적 문제로 인식하는 상황은 도래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만 북측 당국자들은 실리를 얻기 위한 대내외적인 몸짓에는 뼈아픈 고통과 손실이 수반돼야 한다는 교훈을 조만간 얻게 될 것이며, 이는 곧 대남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는 있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2001년의 첫 남북대화인 3차 적십자회담에서는 아직 북한식 신사고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남북관계에서도 신사고가 적용될 듯하다.

이영섭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18:42


이영섭 정치부 youn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