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44)] 조쿠기인(族議員)

2001년 새해 들어 일본 정가가 'KSD스캔들'로 시끄럽다. 중소기업 경영자를 위한 공제조합인 KSD 중소기업경영자 복지사업회의 고세키 다다오(古關忠男) 전이사장이 정계에 거액의 정치자금과 뇌물을 뿌린 사건이다.

KSD로부터 2,000만엔의 뇌물을 받고 국회에서 유리한 발언을 일삼아 수탁수뢰 혐의로 입건된 고야마 다카오(小山孝雄) 참의원 의원이 의원직을 포기했고 그의 정치 스승인 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 의원이 자민당 5역의 하나인 참의원회장을 사임했다.

또 자민당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의 차세대 리더로 꼽혔던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의원이 관방장관 시절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의 국회연설에 KSD가 추진한 '모노즈쿠리(物作りㆍ물건 만들기) 대학'의 설립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삽입한 것과 관련, 경제ㆍ재정담당장관직을 사임했다.

에토ㆍ가메이파를 이끌고 있는 자민당 보수파의 거물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정조회장의 관련설이 돌고 1월 말 개회한 정기국회에서 야당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7월로 참의원 선거를 앞둔 자민당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세키 전이사장이 자민당 의원들에 접근한 이유는 이들을 통해 지금은 후생성과 합쳐진 과거의 노동성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기업 정책은 경제산업성(과거 통산성) 소관이지만 중소기업 관련 정책은 노동성이 관할했었다. 무라카미 의원은 노동성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중소기업 관련 단체와 굵은 줄을 유지해왔다. KSD가 그의 비서 출신인 고야마 의원에 접근한 것도 무라카미 의원의 영향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특정업계나 소관 부처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그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을 일본에서는 '조쿠기인'(族議員)이라고 부른다. 마치 혈연집단처럼 업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의원이란 뜻이다.

원래는 특정분야의 정책에 밝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었으나 정ㆍ관ㆍ업계의 유착으로 비리 사건이 잇따르면서 지금은 부정적 어감이 가득하다.

과거 후생성 소관이던 신약 인가나 의료보험 문제에 영향력을 갖고 제약회사나 의사회, 약사회와 굵은 줄을 대고 있는 '후생족'이 있었다면 무라카미 의원과 같은 '노동족'도 있다. 운수업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운수족'이 있고 농림족이나 수산족, 건설족, 상공족, 문교족, 우정족, 방위족 등이 수시로 언론에 거론된다.

아무나 족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야당은 정책이나 중앙 부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제외된다.

자민당 의원 가운데서도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관료 출신이 아니면 최소한 관련 부처의 장관이나 사무차관을 거쳐야 하고 자민당의 여러 부회의 회장이나 국회 상임위원장 정도는 지내야 한다.

자민당 부회의 의견이 자민당의 정책, 나아가 정부의 정책으로 곧바로 이어져온 정치현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자민당 부회에서의 발언권과 지도력이다. 과거 자민당의 부회는 통신(우정족)ㆍ문교(문교족)ㆍ사회(후생족)ㆍ노동(노동족)ㆍ교통(운수족)ㆍ건설(건설족 )ㆍ농림(농림족)ㆍ수산(수산족) 등 특정 족과 정확한 대응관계에 있었다.

최근의 중앙부처 개편에 따라 자민당 부회가 통ㆍ폐합했지만 회장 아래 과거의 중앙부처별로 부회장을 두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족의원 체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전망이다.

족의원의 가장 큰 문제는 업계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국가 전체적인 체질 및 구조개혁이 늦어진다는 점이다. 모리파 회장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의원이 후생장관 시절인 1993년 우정사업 민영화를 주장하고 나설 당시 우정족이 들고일어나 그를 궁지로 몰았다.

지금은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정도로 대세가 된 우정사업 민영화가 그렇게 지연됐다. 통신사업의 신규 참여가 늦어진 결과 원천기술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보기술(IT) 산업이 상대적으로 낙후한 것도 NTT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우정족이 규제완화에 반대한 결과였다.

족의원은 외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8년 한일어업협정 개정을 위한 교섭 당시 수산족들은 수시로 외무성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결정돼 새해에 운송이 시작된 대북 지원미 50만톤을 모두 외국산 쌀보다 6배 이상 비싼 일본산 쌀로 채운 것도 풍작에 따른 재고의 증가로 쌀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농림족의 입김 때문이었다.

정치인은 지지세력과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관계는 예산심의 과정에서의 편의와 퇴임후 업계에 자리를 얻으며 업계는 경제적 실익을 얻을 수 있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가 바로 족의원이다. 연고를 중시하는 동양 전통의 정치문화가 현대 일본 정치에 아주 묘한 형태로 뿌리를 내린 셈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2/0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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