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재혼정보회사 '행복출발' 최원일 사장

"이혼은 결혼보다 더 어렵고 큰 일"

80년대 중반, 30대 재미교포 청년 최원일(48)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휴스턴 경찰이라고 했다. 한 여자와 어린이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이혼한 아내와 딸의 이름이었다.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통지였다.

달라스에서 휴스턴까지 운전하는 동안 평생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 왜 그들인가.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왜 그들을 데려갔을까.

시신조차 없었다. 사고는 술 취한 트럭운전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했다. 아내와 7살바기 딸 아이가 탄 승용차가 신호대기선에 선 사이 뒤따라오던 거대한 트럭이 정지신호를 무시한 채 돌진해버린 것. 자동차는 몇미터나 튕겨나간 뒤 불 타오르면서 사람의 형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타다 남은 소지품 일부만이 최씨가 경찰로부터 건네받은 유품의 전부였다.

숨진 아내에게 끝없이 용서를 빌었다. 사랑했던 딸도 가슴에 묻었다. 모든 원죄는 자신에게 있었다. 사랑없는 결혼과 이기적인 이혼, 임신 사실을 몰랐다가 뒤늦게 얻은 딸,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처럼 죽음을 당할 일도 없었으리라는 생각에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숨진 아내와 결혼한 건 28세때였다. 23세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이민생활의 외로움에 지쳐 결혼을 서둘렀다.

몇차례 한국을 오가며 신부를 구했다. 맞선에서 아내를 만나 얼굴을 본 것이 단 세 번. 좋은 집안에서 자랐고 착한 마음씨가 좋아보여 쉽게 결혼결정을 내렸다. 빨리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싶을 뿐이었다.


결혼 두달만에 찾아온 염증

달콤한 신혼은 채 두 달을 가지 못했다. 처음엔 그들도 행복했다. 친구나 가족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오직 자신만 믿고 따라온, 착한 아내. 미국식으로 집 한칸, 떠들썩한 혼수 하나없이 시작하면서도 주급을 받아 산 30불짜리 소파 하나에도 누구보다 행복에 겨웠던 시간이었다.

철없는 '결혼 부적격자'가 누린 행복의 시효는 그러나 길지 않았다. 서너달째에 접어들자 염증이 느껴졌다. 결혼생활이 구속처럼 느껴졌고, 착한 아내마저 이유없이 싫어졌다.

특별한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직 혼자만의 갈등이었다. 좀 더 참고 노력해야 된다 싶다가도 공연히 '나는 이 여자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번져갔다. 말벗 하나 없는 아내를 더 외롭도록 방치했다. 기분이 언짢으면 한밤에도 집을 나가 친구집에서 자고 들어왔다.

결혼 5개월만에 이혼 얘기를 꺼낸 것도 그였다. 한 사람의 입회하에서도 법적 이혼이 가능한 미국은 그에게 유리했다.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끝내 도망치듯 그녀를 버렸다. 뒤늦게 사실을 안 부모님은 노발대발이었다.

가족들의 비난을 피해 미국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일종의 도피였다. 결혼 중 임신사실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한국에 발령받아 근무하던 그에게 아내는 갓난 딸을 안고 부대로 찾아왔다. 핏줄은 남달랐다. 딸과의 첫 대면이후 한시도 딸을 잊어본 적이 없다.

군제대후 몇번의 시도 끝에 어렵사리 어린 딸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 아내에 대한 감정도 조금씩 변했다. 재결합을 생각했지만,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많은 망설임 끝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싫어요" 그가 준 상처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받아든 것이 두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 그을린 소지품 일부만을 남긴 채 아내와 딸아이는 죄많은 남편과 아비로부터 떠나갔다. 심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도저히 맨정신으론 견딜 수 없었다. 하던 일도 팽개친 채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며칠이고 밥 한번 입에 대지 않았다. 종일 술만 마시다가 취하면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술을 찾는 생활이 4년 가까이 계속됐다. 179cm 키, 보기좋던 체격이 체중 50kg까지 바싹 말라들어갔다. 심지어 마약까지 복용한 적도 있다. 차라리 그러다가 죽기를 바랬지만, 목숨은 모질었다.


아내·딸 죽음으로 뒤바뀐 인생

폐인으로 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건 또한번의 부음을 접하고서였다. 간암을 앓던 아버지가 끝내 숨을 거두셨다. 6남매중 장남이면서 장남 노릇은커녕 임종 때까지도 가슴에 못을 박은 아들. 재기를 맹세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무역일을 다시 시작했다. 완구나 바닷가재, 청바지 등을 취급하는 일이었다. 신이 내린 망각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평생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고통이 조금씩 진정됐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다시 누군가를 원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기치못한 외로움이 닥쳤다. 이미 40대를 넘어선 나이. 재혼을 위해 결혼상담소를 찾았다. 주선해주는 대로 몇몇 상대와 데이트도 해보았지만, 중요한 결정에선 언제나 흔들렸다.

여성 앞에만 서면 자신에게 다그치듯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책임질 수 있는가. 옛 아내처럼 내가 또 불행에 빠뜨리게 되는 건 아닌가'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의 재혼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레 결혼상담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역업을 그만둘 때가 온다면 다음 사업으론 직접 재혼자들을 위한 일을 해보리라 결심했다. 자신이 시민권자로 살고 있는 미국이나 여타 외국을 다닐 때마다 현지의 관련업체들도 눈여겨봤다.

국내에선 상담소 숫자도 얼마 안될뿐더러 대개 일대일 소개가 전부인 데 비해 외국에선 이벤트형 단체미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만남의 기회와 공간만 제공할 뿐 당사자들끼리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상대를 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기습처럼 닥친 IMF는 많은 가정을 무너뜨렸다. 속출하는 이혼부부를 보면서 더 늦출 수 없어,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3년전 '행복출발'이란 회사를 차렸다. 초혼과 재혼을 포괄하는 기존 결혼정보업체와는 달리 오직 재혼 희망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재혼전문정보회사였다.

처음엔 직원 한 명과 단촐하게 시작했다. 이혼 얘기는 물론 재혼 얘기를 남사스러운 치부로 생각하는 우리 풍토에서 제 발로 찾아오는 재혼희망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아는 사람들이나 절박한 사람들을 수소문해 돈 한푼 받지 않고 뛰어다녔다.

사업체는 성큼 자랐다. 3년만에 회원이 4,500명으로 늘었고, 현재 28명의 직원을 두고도 일손이 달릴 만큼 제법 규모를 갖추었다. 새 반려자를 찾아준 사람도 700여쌍에 이른다. 재혼의 성사율은 의뢰자의 20-30%선. 초혼보다도 높다.

미혼자들에 비해 교제기간과 결정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혼 부부 10쌍중 7-8쌍은 다시 이혼을 한다. 쉽게 만날수록 쉽게 헤어지는 것은 초, 재혼을 불문한 공통함수. 진중한 만남과 책임감 없이는 재혼 역시 지켜지기 어렵다.

사실 최 사장이 바쁜 건 재혼문제가 아닌 다른 일에 있다. 어찌 보면 자기사업에 '해로운' 일에 더 열심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혼부부가 늘수록 그의 수요자는 더 증가하는 법.

그러나 '이혼하지 말라'며 오히려 길을 막는다. 밤이고 낮이고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익명의 이메일이나 핸드폰 상담전화도 그의 몫이다. 주로 이혼을 생각하는 기혼자들의 고민상담이다.


헤어지면 사는것보다 더 불행해지는 부부 많아

"이혼할까 말까 갈등중인 분들은 사실상 헤어지기보단 함께 사는 것이 더 나은 분들입니다. 고민이 된다는 건 그래도 뭔가 저울질 할 게 아직 남아있다는 얘기거든요.

정말 이혼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갈등 자체가 없습니다. 바로 결심이 서버리니까요.

상담을 할 때마다 이혼하고 싶은 이유는 물론이고, 나이와 자녀 수, 현재 가진 돈, 고정적인 수입이나 할 수 있는 일 등등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을 물어보는데,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헤어져야 될 부부보다는 헤어지지 않는 편이 덜 불행한 부부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무조건 이혼을 막는 것은 아니다. 때론 이혼이 필요한 사람도 있긴 있다. 이 세상엔 결혼해선 안 될 사람과 이혼해선 안될 사람이 분명 있긴 있다는 것도 그가 재혼정보사업을 통해 배운 것중 하나.

특히 알콜중독이나 상습 구타, 도박 등에 빠진 사람은 절대 결혼해서 안 된다. 결혼으로 애꿎은 가족까지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이혼이 불가피한 사람에겐 차라리 현실적인 대책을 일러준다. 아이들을 데리고 살 지하 월셋방 보증금이라도 벌어 마련한 뒤 독립하라며 무작정 이혼 자체만 서두르는 실수는 피하도록 돕는다.

필요할 땐 매정하도록 상대에게 이혼을 말하는 그이지만, 그의 입에서 그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관계를 깬 사람이 누구인가는 상관없다. 어느 쪽이 원인 제공자든 이혼은 양자 모두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충격과 앙금을 남긴다.

이혼의 해방감은 잠시. 씩씩하게 헤어지고도 몇 년뒤 이혼전보다 더 고통스런 삶으로 후회하는 이들을 그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 자신부터가 어땠는가. 이혼은 결혼보다 더 어렵고 신중해야 할 중대사다.


재혼사업 벌이며 재혼꿈 접어

몇해전 재혼을 하려던 최 사장은 오히려 이 사업과 함께 재혼결심을 접었다. 차라리 몰랐던 게 약, 너무 많이 보고 들어서 이젠 망설여진다. 지금은 이 일이 주는 즐거움만으로도 그럭저럭 외로움을 잊고 살 수 있다.

하지만 몇년전 갑자기 닥쳐오던 외로움처럼 언제 또 재혼하고 싶어질 지 자신도 장담할 순 없다. 그것이 인간이므로.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앞으로 아무리 화려한 미래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가슴안에 숨은 인생의 실패감은 평생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아니면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 인생은 이미 틀렸습니다. 설령 앞으로 아무리 엄청난 사회적 성공과 부를 쌓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가정적인 면에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패배감은 결코 만회되지 않을 겁니다. 이것 때문에라도 이혼을 더 말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회사문을 나서자 길거리는 온통 반 아수라장이었다. 꼼짝달싹 못하고 얽히고 설킨 자동차들. 그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눈이 온 도시에 퍼붓고 있었다.

정영주 자유기고자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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