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송파구 오금동(梧琴洞:五輪洞)

나라 안에 전쟁이나 환란이 일어나면 땅이름이 바뀌거나 새로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불과 반세기 전의 동족상잔 6ㆍ25전쟁만 하더라도 많은 땅이름을 낳았다. 김일성 고지, 저격능선, 피의 능선, 펀치볼, 백마고지가 있는가 하면 파로호(破虜湖)같은 땅이름이 그 보기다.

서울 송파지역 일대의 땅이름을 조사해보면 병자호란(丙子胡亂)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이 무척 많다. 병자호란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투구를 쓰고 용마를 타고 출전했다는 '투구봉'과 '마산'(馬山) 그리고 농을 열어 갑옷을 꺼내 입었는다는 '개롱리'(開籠里)가 있다.

또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이끄는 대군이 진을 쳤다는 진텃벌(陳墟坪:석촌동 일대). 그 진텃벌(석촌동 42번지)에는 오늘날 도시화로 고밀도 아파트가 들어차 가늠할 수 없지만 치욕의 '한의비'(汗一碑:삼전도공원내)가 서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 45일간 버티다가 마침내 엄동설한의 동지 섣달에 맨발로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문을 열고 걸어나와 삼전도(三田渡)에 마련해놓은 청 태종의 수항단에 무릎을 꿇었다.

그뒤 청나라의 강압으로 그 자리에 치욕의 비를 세우니, 비의 머리에는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앞면에는 청문자로, 뒷면에는 한자로, 당시 부재학이었던 이경석(李景奭)이 썼다.

이 글을 쓴 이경석은 그뒤 "글을 배워 이런 비문을 쓸 바에는 차라리 글을 안배우는 것만 못하다"며 후손에게 "다시는 글을 배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일화가 있다.

이 한의비(일명 청태종비)는 갑오경장 이듬해에 나라의 수치라 하여 한강가에 쓰러뜨렸던 것을 1913년 일제가 다시 세웠다. 그러나 광복 뒤에 다시 땅에 파묻었던 것을 1963년에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하여 교육부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세우고 사적 제1호로 지정하였다.

이 삼전도 나루에는 미석탄(米石灘)이라는 애달픈 사연이 얽힌 여울이 있었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보수할 때 그 공사를 크게 둘로 나누어 서남쪽은 이회(李晦)에게, 북쪽은 벽암대사(碧岩大師)에게 맡겨서 했다.

벽암대사는 그가 맡은 부분을 기한 내에 끝내고 돈이 남아 국고에 반납했다. 그러나 이회는 반도 못쌓아서 비용이 떨어지므로, 그 아내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삼남지방(충청 경상 전라)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다시피 하여 쌀을 배에 싣고 한강을 따라오다가 삼전도에 이르러 남편 이회가 책임을 추궁당해 참소됐다는 소식에 접했다.

이회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에 몸부림치며 울다가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뒷날 나라에서 이회의 충정을 알고 이회를 청계당(淸溪堂)에 배향하는 동시에 그 부인의 사당을 이곳 나루터에 지으니 부군당(府君堂)이라고 하였다. 이회의 부인이 몸을 던져 죽은 여울을 '쌀섬여울'(米石灘)이라 불렀다.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면서 오금동 뒤에 있는 백로고개에 이르러 "아이구! 내 오금이야!"한 것이 오늘날 '오금동'(梧琴洞) 또는 '오금골'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오금나무가 군데군데 자라는데다가 가야금까지 만드는 사람이 살고 있어 '오금동'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작 어느 설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다.

원래 오금동 지역은 1963년 이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했다가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 성동ㆍ강남ㆍ강동구로 옮겨다니다가 오늘의 송파구에 속한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오금동 일부가 분리돼 인조가 몽진길에 오금이 아파하던 자리엔 올림픽 선수ㆍ기자촌 아파트가 들어차 오륜동이 생겨났다. 88올림픽 때 세계 각국 선수들이 잠자리에 다리 아파한 것도 '오금'이란 땅이름과 그리 무관하지 않는것 같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2/06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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