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미술평론가 곽대원(上)

"내가 가진 최고의 재산은 사람"

미남도 아니다. 달짝지근한 궤변의 명수도 아니다. 재벌 2세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의 주위엔 사람들이 꼬인다. 그 숫자가 가히 엄청나다. 최소한 2만명?

정ㆍ재계의 유명인사는 물론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 각 분야의 전문인에서부터 평범한 직장인, 주부, 청소년까지 연령, 직업, 지역을 막론한, '좋은 사람 네트워크'.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렇다.

그의 직업이 뭔지는 지금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본업 덕에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된 건 사실이지만 혹시 '세력구축'의 다른 목적이 있는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누명 또는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주고받은 명함만 수만장.

세는 것조차 라면상자 단위다. 얼마전 우연찮게 그와 며칠간 붙어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본 한 후배는 그와 헤어지는 날 이런 말을 했다. "형은 국회의원도, 재벌도 아닌데 왜 가는 곳마다 잘 나가는 분들이 건물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고 인간적으로 잘 해주지?"

곽대원(43). 지인 사이에선 알면 알수록 더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전설도 많다. 매번 나타날 때마다 새 얼굴을 대동하는 바람에 그를 아는 사람은 아예 낯선 객이 보여도 누구와 온거냐고 묻지 않는다. 물어보나마나 십중팔구 '곽대원 패밀리'.

한번은 그가 수첩정리를 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도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붙어 새 문서로 명단을 옮겨적는데 걸린 시간이 꼬박 3일. 전체도 아닌 수첩 하나에만 800여명이 적힌 것을 보고 혀를 찼다는 목격담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옆사람을 친구로 만들어 데리고온 사람. 심지어 말조차 통하지 않는 이태리에 가서도 가는 곳마다 현지인을 즉석에서 친구로 포섭하는 재주에 아내를 경악케 한 전력이 있다.

선거철의 청중동원을 위해서도 아닌데 그는 무엇을 위해 끝도 없이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는 것일까.


- 원래 사람욕심이 많은 건가?

"천성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대화가 통하고 좋은 사람이다 싶으면 놓치고 싶지 않아진다.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이유없이 좋다. 또 그런 사람이 아주 많아져서 서로 도와가며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은가.

혼자만 알아두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 모두 이리저리 연결시키다보니 그 안에서 결혼한 사람도 많고 취업시킨 일도 많다. 워낙 다양한 사람이 있다보니 웬만한 문제는 이 네트워크안에서 다 해결되더라. 사람은 참 중요한 재산이다."


-요즘처럼 이해타산적이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세태에서 어떻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몇마디 대화에 금새 가까워지는지 쉽게 이해가 안간다. 당신의 뭘 보고 사람들이 오는지 스스로 분석해본 일이 있나? 처음에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는가?

"아마도 내게서 편안함, 신뢰감 같은 걸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나는 이런이런 분야에 있는데 당신과 친해진다면 이런이런 점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먼저 말을 시작한다.

그가 가진 장점, 내가 가진 장점을 서로 나눈다는 의미다.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그럼 100% 흔쾌히 응해온다. 사정상 명함만 받고 헤어진 사람이라도 다음날쯤 전화해 꼭 이야기를 나눈다. 전화를 끊을 때도 그냥 '다음에 봅시다'가 아니라 '대략 언제언제쯤 뵈었으면 한다.

그때 시간이 괜찮겠냐'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인사치레나 빈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작은 것이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모임에서 그를 알게 됐다는 한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들려준 적이 있다)


-매일마다 새로운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건데 너무 많아서 헷갈릴 때는 없나?

"그렇쟎아도 며칠에 한번씩 가방을 정리할 때면 새로 받은 명함이 한다발씩 나온다. 그런데 누가 누군지 명함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옛날엔 다 기억했는데 요즘은 필요할 때마다 명함에 수시로 메모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있다고 본다. 단지 그 친분관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해가는가가 문제인 것 같은데 당신의 '유지대상'은 많아도 너무 많다.

아무리 시간을 잘 쪼개 쓴대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다 챙길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있는가?

"틀을 정해두고 만나진 않는다. 그럴만한 계기가 생긴다거나 언제 어디를 갔는데 마침 시간여유가 된다면 그 부근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고 오는 정도다. 만나는 횟수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또 내가 누구를 찾기도 전에 나를 보러오겠다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없이 걸려온다.

그것만 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약속이 꽉 찬다. 어제만 해도 예정된 건 점심약속 하나 밖에 없었는데 2시, 3시, 5시, 6시반, 7시, 10시로 약속이 연달아 잡혀 밤 늦게까지 밖에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능한 한 약속장소는 한 구역 안에 집중시켜 잡는다.

이런 식으로 20년 동안 거의 매일 술이었다. 술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인데 워낙 술 자리가 잦다보니 별명이 '걸어다니는 술집'이다."


-본인의 일을 보랴, 사람들 만나랴, 그 정도로 다니면 몸이 견뎌나질 못할 것 같다. 피곤하거나 질릴 때도 있지 않나?

"정 몸이 안 좋을 땐 모든 약속을 다 거절하고 무조건 집에 들어가 쉰다. 몸이 힘들 때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에게도 은연중 불편을 줄 수 있다.

그럴 바엔 쉬고 다음에 만나는게 낫다. 대개 시간은 짧고 만날 사람은 많아서 문젠데 약속이 너무 빽빽할 땐 아예 만나야 할 사람을 전부 합쳐버리기도 한다.

즉 오늘 저녁에 연달아 세군데 약속이 있다고 치면 A장소에서 만난 사람을 잠시후 B모임에 데려가 함께 합석시키고 이들을 다시 C모임에 끌고가 함께 어울리는 식이다.

나중엔 아주 대부대가 된다. 물론 성향이 비슷해서 서로 잘 어울리겠다는 판단이 들 때만 그렇게 한다. 그러면 누구와도 헤어질 필요가 없고 그들끼리도 더 많은 사람을 사귀게 돼 다들 좋아한다."


-원래부터 사람을 잘 몰고다니는 타입이었나?

"아니다. 25살 때까지도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친한 사람 중에서도 특히 여자들이 많다는데..

"사실은 남자가 더 많은데 아무래도 여성은 눈에 더 잘 띄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하긴 내가 여성을 좋아하기도 좋아한다.(웃음) 하지만 오해를 살 일은 전혀 없다.

언젠가 한 여자후배랑 술을 마시다가 이 아가씨가 취해서 기절해버렸다. 남자라면 근처 여관에라도 데려가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난감해하다가 결국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우리 집에 데려간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일로 집사람이 화를 내거나 부부싸움 한번 하지 않았다. 아내가 이해해준다. 딱 한마디. '왜 이만큼 취할 때까지 술을 먹였냐'고 해서 '이렇게 술에 약한 줄 몰랐다'고 대답한 게 전부다. 내가 여자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바람기는 없다는 걸 집사람도 안다."


-다른 사람에게 많은 시간을 쓰다보면 상대적으로 가족과 나눌 시간이 줄어들텐데 집에선 어떤가? 날마다 늦는 남편, 아버지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지 않는가?

"그 때문에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어제도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가 잠을 별로 못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딸아이 주려고 빵도 굽고 계란 프라이도 만들어 먹였다. 집사람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항상 애쓴다. 가정적인 편이다."


-사람 좋아하는 당신에게도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제일 싫은 사람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특히 술자리에서 주사가 있으면 그 자리로 끝이다. 또는 자기 말만 독단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가진 것을 과시하려고 오는 사람도 더 만나지 않는다.

'가진 것'이란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지식일 수도 있다. 어떨 땐 상품영업을 위해서 어떤 업체 실무자에게 말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분명하게 거절한다. 문제를 푸는건 스스로 해야지, 해법까지 남에게 기대면 안된다. 청탁은 들어주지 않는다."


-'가진 사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심정적으론 싫어도 힘있는 사람과 친해두면 손해볼 건 없지 않냐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나?

"싫다. 내게 손해라 하더라도 할 수 없다. 경험적으로도 정서가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만나면 오히려 불길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당신 마음같지 않을 수도 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발등을 찍혀 본 일은 없는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업체 사장이 미국의 모 업체로부터 업무적 제휴를 제안받았다며 아는 사람중에 외국출장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는 길에 현지업체와 접촉해 자세한 내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상당히 큰 펀딩이었다. 마침 인터넷방송 분야의 모 사장이 바로 그 도시로 출장을 간다고 하길래 그 일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현지에 가서 딴 욕심이 생긴 거다. 부탁한 업체가 아니라 자기 회사가 펀딩받는 것으로 구두계약을 하고 온 것이다. 말하자면 중간에서 가로챈 거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장이 돌아왔을 때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앞으로 당신이 사업하는데 나와의 관계가 거론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언제 누가 내게 물어와도 나는 당신에 대해 안좋게 얘기할 것이다.' 그후 두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런 일을 통해 당신이 경제적으로 얻는 소득도 있나?

"금전적인 것과는 전연 상관없다. 돈은 내 본업으로 벌면 된다. 어찌 보면 재테크의 개념과 나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 재작년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주식 4만주가 80배 가까이 값이 뛰었을 때도 안 팔았다.

그때 만나는 친구마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소리를 나한테 했다. '너 같은 로맨티스트 성미엔 주식을 안파는게 당연하다.' 그래도 술은 거의 공짜로 마신다. 내가 내겠다고 해도 어딜 가든 앞서서 술값을 내는 친구들이 많다." <계속>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기자

입력시간 2001/02/1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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