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대우왕국] 김우중, 실패한 신화의 주인공

샐러리맨의 우상에서 경제 사기범으로 전락

성공이냐 실패냐는 결과가 말을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 김우중은 분명히 실패했다. 대우그룹의 해체와 그 이후 밝혀지는 낱낱은 기업인 김우중을 한국민의 공적(公敵)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20조원이 넘는 돈을 해외에 불법으로 빼돌린 경제사기범으로 쫓기고 있는 판이니 세상인심을 탓하기는 어렵다.

실패가 드러나기 전까지 기업인 김우중은 젊은이와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그는 1967년 31세 때 자본금 500만원으로 창업한 대우실업을 32년 만에 자산순위로 한국 재계 2위, 세계 500대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신화를 이룩했다. 하지만 그가 실패자로 낙인찍힌 지금, 그의 신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기업인 김우중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의 거대한 부침까지 함께 잊어버려도 좋을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화는 신화. 아직 그에게 애증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는 마치 한(漢)고조 유방(劉邦)과 천하를 쟁패했던 항우(項羽)를 연상시킨다.

연전연승 세력을 키웠지만 마지막 전투에 패해 모든 것을 잃었던 항우의 스토리를 닮았다. 무장해제된 적 사령관에 다소간의 예를 표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실패한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

김우중 회장에게는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한국 경제인 중 그만큼 해외에 널리 알려지고 또 해외에서 펀딩이 가능했던 인물도 없었다.

때문인지 그의 자서전과 경영철학을 담은 책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영문판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와 함께 에스페란토어 번역판도 있다. 1998년 3월에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전략을 강의용 케이스로 채택해 교재를 발간했다.

에스페란토어판에 대한 1999년 4월호 세계 에스페란토협회 기관지의 서평이 매우 신랄하고 의미있다. '일벌레의 충고'란 제목의 서평 일부분. "저자인 김씨는 자신의 철학, 생활방식, 업무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삼위일체가 그의 회사를 성장시키고 성공시켰다.

그러나 씨앗은 비옥한 땅에서만 자랄 수 있으며, 좋은 비료가 그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 전쟁 뒤 한국의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결핍된 만큼 모든 산업과 상업 분야의 창업이 환영받았다.

정부는 창업에 호의적인 조건을 조성하고 기업활동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우의 성공이 창업자의 능력으로만 이뤄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외부의 호의적인 조건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그 조건을 잘 활용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능력이자 장점이었다."

김 회장을 폄하하는 사람은 곧잘 환경을 강조한다. '압축성장'을 외치는 권력과의 교묘한 결탁이 대우의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좋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또다시 경쟁이 존재한다. 대우의 신화가 김 회장의 신화인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서평이 우호적인 기업환경과 김 회장의 개인적 강점에 형평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일이 취미이고 목적이었던 일벌레

김 회장은 평소 "일이 취미고 목적"이란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인지 김 회장은 개인생활을 지나치게 도외시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벌레였다.

골프와 다른 잡기를 하지 않고 여자관계가 깨끗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출장으로 보냈던 그는 기내 결재와 기내 취침, 기내식에 익숙했다.

그와 해외출장에 동행했다 초죽음이 됐던 한 프로 바둑기사는 김 회장의 업무와 일정에 혀를 내둘렀다.

김 회장의 비즈니스 능력은 1978년 옥포조선소 건설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옥포조선소 건설을 떠맡으면서 김 회장은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건설비 전액을 국가에서 지원할 것. 둘째, 조선업 불황에 대비해 미 7함대 수리를 유치할 것. 셋째, 옥포를 대단위 종합 기계공업단지로 육성할 것. 김 회장은 이렇게 조선사업에 뛰어들었다.

김 회장의 근면과 비즈니스 감각은 한국전 당시 대구 피란시설부터 키워졌다.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소년 김우중은 대구 방천시장에서 신문팔이를 했다.

경쟁자를 누르려면 판매속도가 빨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잔돈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장통 가게에 신문을 팔 때는 우선 신문을 던져놓고 되돌아오면서 돈을 받는 게 유리하다는 사실도 터득했다.

김 회장의 기업확장 전략은 인수합병과 공격경영, 그리고 이를 위한 차입이었다. '인수왕 김우중'이란 별명은 대우의 성장사를 압축하고 있다. 1969년 세창직물 인수를 신호탄으로 1970년 동남섬유, 1972년 고려피혁, 1973년 영진토건ㆍ동양증권ㆍ동남전기를 차례차례 사들이면서 사업을 다각화했다.

1976년에는 부실기업으로 정리돼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던 한국기계를 인수해 대우중공업의 기틀을 닦았다.

이같은 성장과정을 놓고 김 회장을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삼성이나 현대, LG 등 다른 창업자와 차별하는 시각도 있다. 대우가 김 회장이 스스로 만들어 키운 회사라기 보다는 남이 세워놓았던 회사를 인수해 결합한 대기업 집단이란 비판이다.


'기업인 김우중' 평가,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대우경제연구소 사장을 지낸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 회사를 만들기가 어쩌면 더 쉽다. 김 회장이 인수를 통해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피인수 기업은 대부분 부실회사였다. 김 회장은 기존기업의 부실을 해소하면서 키우는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이 실패한 것을 나는 성공시킨다'는 도전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부실기업 인수를 통해 사장될 자산을 유지ㆍ발전시킨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의원에 따르면 김 회장은 도전정신과 열정이 엄청나게 강해 일이라면 시간을 가리지 않았고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신을 냈다. 계열사 사장이나 참모들이 불가능을 주장해도 막무가내였다. 김 회장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면서 고위 경영진은 몹시 힘들어했다.

경제적 풍요도 개인적 여가도 향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우 임원들이 받는 대우는 경쟁그룹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졌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우리는 희생하는 세대"란 말로 정당화했다. 김 회장은 또 부동산 투기는 권유해도 절대 안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해외 등 신개척지를 개척하는 스타일이었고 그만큼 사업에 대한 리스크도 컸다는 평가가 있다.

김우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한구 의원의 이야기가 의미있다. "빼돌린 돈의 액수로만 김 회장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영국의 비밀계좌운용조직(BFC)이 언제 개설돼 얼마동안 얼마가 어떻게 운용됐는지 그 실체를 밝혀야 한다. 해외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한 종잣돈인지 여부 등 돈의 성격이 밝혀져야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내려질 수 있다."

한국의 기업문화와 한국의 기업환경을 도외시하고 기업인 김우중을 평가하기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13 18:59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