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대우왕국] 대우맨들의 엇갈린 운명

핵심인물 철창행, 일부는 대우 떠나 건재

대우맨들의 엇갈린 운명의 끝은 어디일까? 한때 세계를 다 집어삼킬 기세로 세계경영에 나섰던 대우가 '국가경제를 말아먹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 1999년 7월.

그 이후 대우를 살리기 위해 안간 힘을 썼던 대표적인 경영진이 대거 구속되면서 대우의 시대도 막을 내리고 있다.

물론 '넓고 할 일 많은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김우중 회장이 이국 땅 어느 곳에선가 대우의 마지막 깃발을 움켜쥐고 있을 테지만.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있지만 일부 핵심인물은 차가운 철창 속으로, 일부는 여전히 교수와 경영인, 정치인 등으로 변신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운명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샐러리맨의 우상, 그들의 운명은

2월1일 전주범ㆍ양재열 전 대우전자 사장. 2일 장병주 전 ㈜대우 사장,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총괄사장,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하나같이 대우 세계경영의 선봉에서 대우의 성장을 이끌었고 영욕을 함께한 멤버다. 대우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직원들은 한결같이 "이들과 같은 전문경영인이 되는 것이 모든 샐러리맨의 꿈이었다"고 토로한다.

2일 구속된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대우그룹의 '베테랑 소방수'였다.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온 대우그룹 일선에는 어김없이 김 전 사장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10년간 근무한 뒤 대우실업에 영입된 1973년 이후 대우의 주요 적자기업과 노사갈등의 현장에 있었다.

지난 1987년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당시 노사문제와 누적 적자 등으로 그룹의 가장 큰 현안이며 골칫거리였던 옥포조선소의 회생을 주도한 것으로 '소방수 임무' 스타트를 끊은 김 전 사장은 1990년 대우조선, 1991년 대우자동차 사장으로 옮겨다니며 대우 세계경영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룹 내에서 '팔방미인'이라고 불리웠던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재무부 재직 시절 ㈜대우 화학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입사 3년만에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관료 출신의 전문경영인이었다.

장 전 사장은 특히 ㈜대우를 맡았던 1998년 '나라사랑 금모으기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장기간에 걸친 해외지사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국제금융의 흐름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자신의 장기에 발목을 잡혀, 외화유출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대우전자의 두명의 전직 사장들 역시 대우경영의 몰락과 함께 침몰했다. 양재열 전 대우전자 사장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대우에 입사한 뒤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외화유출과 분식회계의 계통선상에 있었다는 이유로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전주범 전 사장의 경우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후배로 승승장구하다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에 강한 반발의사를 표시하면서 사장직을 박차고 나가는 등 전문경영인의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외화유출 혐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런던스쿨, 회장의 하수인 혹은 금융 전문가

검찰의 대우그룹 경영비리 조사결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의 '런던스쿨' 멤버에게도 눈길이 쏠리고 있다. '런던스쿨'은 영국 런던에 있는 ㈜대우 지사의 별칭. 이들은 런던지사의 자금조직인 BFC(British Finance Center)와 직ㆍ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FC는 ㈜대우가 해외자금 입출금 창구로 1981년부터 영국 현지에서 운영하던 금융센터. 대우그룹의 해외자금 차입 및 운용을 책임졌던 실무 금융진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갔다.

이들은 한때 놀라운 금융기법을 과시하며 세계경영의 고비마다 자금줄을 터 왔고 이같은 활약 덕분에 대우그룹을 움직이는 실세가 됐다. 대표적 인물이 이번에 검찰에 구속된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및 대우통신 사장.

㈜대우 근무시절 런던지사에 10년 넘게 있었으며 사내 최고의 금융 베테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해외 선진 파이낸싱 기법을 동원해 저리의 자금을 대우에 수혈했다.

김 전회장의 비서 출신으로 초고속 승진신화의 대명사인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도 멤버중 하나. 그는 ㈜대우에서 그룹 기획조정실 이사, 전무 등을 지냈으며 1995년 45세의 나이로 대우중공업 종합기계부문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추경석 전 국세청장과 사촌지간이다. 이밖에 워크아웃 직전까지 런던지사를 지킨 이동원 전 부사장과 이번에 구속된 이상훈 전 ㈜대우 전무도 런던스쿨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엇갈린 명암의 끝은 어디일까?

배순훈 전 대우전자 회장,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 이한구 전 대우경제연구소장. 하나같이 '대우'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경영인과 그룹 정책브레인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우의 분식회계, 외화 밀반출 혐의 등을 벗어나며 아직도 자신의 일을 챙겨나가는 '또다른 운명의 길'에 서있다.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모델로 유명한 배순훈 전 회장은 197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장에서 대우중공업 이사로 영입돼 7년간 대우전자 사장 및 회장을 맡으면서 대우 전문경영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1997년 프랑스 본사 사장으로 핵심경영진에서 물러난 뒤 1998년 초 국민의 정부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맡으면서 대우와의 인연을 끊었다. 정보통신부 장관 재직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 반대발언과 관련해 장관직을 사퇴한 뒤 지금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이면서 벤처기업인 리눅스원 회장직을 맡고 있다.

윤영석 전 회장은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2년 후배로 '리틀 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핵심측근이었다. 그는 대우그룹 재직시 17년동안 대우조선, 대우중공업, ㈜대우 등 그룹 핵심계열사의 대표직을 맡았고 김우중 회장이 국내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룹의 국내경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윤 전 회장은 1998년 삼성과 현대그룹의 전문경영인을 제치고 한국중공업 사장으로 영입된 후 한국중공업이 최근 두산에 인수된 이후에도 사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우 기업어음(CP) 2,000억원 어치를 한국중공업 자금으로 매입한 뒤 아직까지 800억원을 상환받지 못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오는 4월 한국중공업이 두산그룹에 완전 인수되면 거취가 결정될 윤 전 회장은 최근 "대우에 빌려준 자금문제는 사장직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해결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대우 경영 일선에는 있지 않았지만 대우경제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 그룹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했던 이한구 전 소장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케이스. 행정고시 출신으로 재무부에 재직하다 대우그룹과 인연을 맺은 그는 한나라당 정책실장으로 영입돼 16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진출했다.

현재 이 전 소장은 한나라당 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경제통으로 활약중이지만 대우그룹 부실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대우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여당의 공격을 받고 있는 곤혹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우그룹과 직접인연은 끊었지만, 빅딜 반대ㆍ자금 지원ㆍ세계경영 옹호 등으로 대우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있음을 간간히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대우의 한 관계자는 "조그만 무역회사에서 시작하다 보니 도전적 인사가 많이 들어왔고 영입파에 대한 견제나 차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며 "구속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대우의 영욕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직원이 아직도 그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원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13 19:31


정상원 경제부 ornot@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