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제주의 봄

봄 이야기를 해보자. 성급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제주도의 바다가 이미 봄기운을 품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 제주는 바다에서 올라온 봄소리로 요란할 터다.

제주의 봄은 동쪽 끄트머리에 왕관처럼 솟아있는 성산 일출봉에서 시작된다. 일출봉 가는 길 양켠에 노란 유채꽃이 그 전령이다. 벌써 첫꽃이 피기 시작했다. 20일께면 꽃밭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많은 꽃이 필 전망이다. 온기를 머금은 바람, 언 몸을 풀고 넘실대는 파도, 그들이 꽃과 재잘거리는 제주의 봄 몸살은 다정스럽다.

2월에 피는 유채화는 지난해 12월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린 것이다. 굳이 설명을 달자면 조생종이다. 3월 중순에는 제철꽃이 바닷가를 따라 제주도 전체를 빙 돌아 피다가, 4월이면 섬 전체가 노란색으로 물든다. 조생종 꽃밭에 들어가려면 값을 지불해야 한다. 농부들이 간판을 내걸고 자신이 피워 놓은 꽃의 배경료를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족당 1,000원이었다. 올해에도 그 정도 받을 전망이다. 인기있는 여행지의 야박한 상술에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봄을 불러온 그들의 땀을 생각해 누구나 흔쾌히 값을 치르고 꽃밭에 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웃에게 카메라 셔터를 부탁하는 신혼부부의 미소.. 꽃밭은 노란 행복으로 넘쳐난다.

일출봉에 머물던 봄은 바다를 건너 우도로 이어진다. '제주의 제주'로 불리는 우도는 제주의 부속 섬 중 맏형에 속한다. 성산포에서 페리를 타고 10분이면 닿는다. 검은 돌담 속에 집과 밭이 숨어있다. 이미 무릎까지 자라버린 파란 보리와 마늘이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여행객을 맞는다.

햇살을 많이 받는 곳은 우도봉. 남쪽을 바라보는 이 언덕은 벌써 봄기운이 완연하다. 언덕은 작은 소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 모두 잔디밭이다. 온종일 볕을 받는 잔디는 밑둥부터 파란 물을 머금고 있다. 바닥에서 솔솔 올라오는 봄냄새를 맡으며 언덕에 오른다. 어느 사이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우도의 파도는 이미 여름을 향해 달려나가는 듯 하다. 산호사 해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산호모래가 깔려있는 곳이다. 흰 바닥 위에 있는 물은 깊고 푸른 색으로 반짝거리는 법. 산호사 해변의 물빛은 신비한 비취색이다. 마셔보고 싶고, 몸에 바르고 싶다.

그 매력적인 빛이 봄기운을 잔뜩 머금고 백사장에 넘실거린다. 사람들은 작은 해변을 떠날 줄 모른다.

제주의 내륙에서 가장 먼저 봄을 타는 곳은 비자림이다. 어쩌면 이곳에는 애당초 겨울이 없었는지 모른다. 비자나무는 상록수. 300~800년생 나무 2,600여 그루가 산 하나를 뒤덮고 있다. 파란 잎 아래 파란 이끼가 자라고 있다. 깊은 숲으로 산책로를 냈다.

연인의 발걸음이 느긋하다. 군데군데 벤치가 있다. 숲의 내음을 맡으며 마냥 앉아있고 싶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 제주도 눈 풍년을 맞았었다. 한라산은 여전히 많은 눈을 이고 하얗게 우뚝 서있다. 대지에 충만한 봄기운을 만지며 산꼭대기로 달아난 겨울을 바라보는 기분. 계절의 약속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권오현 생활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1/02/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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