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때를 기다리며 '민심 속으로'

마라톤에 비유되는 여당의 대권후보 레이스에서 과연 누가 테이프를 끊을까. 이같은 논란에서 '이인제'란 이름 석자는 빠지지 않고 오르내린다. 그러나 정작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은 요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에게서 '튀는 발언'을 듣기도 어렵다. 지난해 가을만 해도 이 위원은 "국민 지지가 높은 사람이 후보가 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국내의 민생현장으로, 해외로 향하는 그의 발길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그의 측근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 측근은 "내년 초 대선후보 경선이 있을 것이므로 올 가을부터 IJ(이인제 최고위원의 영문 이니셜) 캠프는 올코트 프레싱으로 움직일 것이다.

지금은 외연을 넓히고 당내에서 정지작업을 하면서 워밍업을 하는 단계" 라고 말했다. 이 위원이 여의도 정우빌딩에 있는 캠프 사무실 규모를 최근 두배 이상 늘린 것도 이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


민생현장 찾기 등 후방서 기반다져

이 최고위원의 낮은 목소리는 대선후보 경쟁에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김중권 대표와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 등이 최근 강한 톤의 발언을 쏟아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의 측면 지원을 받으며 '강한 여당론'을 설파하고 있고, 노 장관은 '언론과의 전쟁불사'발언 등 독설을 퍼붓고 있다.

이 위원은 여권이 강경 드라이브를 하는 정국에서는 전면에 나서기 보다 후방에서 기반을 다지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너무 일찍 속도를 내서 청와대측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이 최고위원은 대신 두가지 구호를 내세워 동분서주하고 있다. '민심 속으로'를 캠프의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대동(大同)의 정치'를 좌우명으로 정했다.

이 위원이 2월6일 1박2일 일정으로 충남 당진의 농촌을 찾아 직접 삽을 들고 폭설로 무너진 비닐하우스 복구작업을 벌인 것은 민생현장 찾기 행보의 시동인 셈이다. 이 위원은 32년만의 폭설이 내린 15일 밤에는 예정에 없이 대방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자택이 있는 안양으로 이동하면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위원은 또 18일 경기 시흥시 시화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을 방문, 근로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지난 1월 하순 부시 미 대통령 취임식 행사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데 이어 2월21일에는 측근 의원 4명과 함께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지난해 4ㆍ13 총선 때 "서산에 지는 해"란 표현을 써가며 공격했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고개를 숙이고 관계개선을 모색한 것은 대동정치의 일환이다.

이 위원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인용,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며 화해 메시지를 전한데 이어 1월 하순 미국 방문중에 뉴욕에서 같은 호텔에 묵은 JP를 찾아 예의를 갖추었다.

이 위원은 1월1일 이승만ㆍ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잇달아 찾아 각각 '건국의 부(父)', '근대화의 부'라며 추모하고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한 것도 대동정치와 맥이 닿아있다.

그러면 이인제 최고위원의 전략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이인제 캠프는 무엇보다 높은 국민 지지도에 기대를 걸면서도 다크호스가 급부상할 가능성에 대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 위원측은 김중권 대표와 노무현 장관, 한화갑 최고위원 등을 '잠재적 경쟁자'로 상정하는 분위기이다.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낸 김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신임을 받고있으며, 동교동계의 한 최고위원은 폭넓은 당내 기반, 노 장관은 나름의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다.


잠재적 경쟁자 상정, 긴장 늦추지 않아

우선 대중적 지지도에서 이 위원은 지난 대선 출마의 프리미엄을 업고 선두를 달리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이 위원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가상대결에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다.

민주당 후보로 이인제 최고위원이 결정됐을 때의 지지도를 물은 결과 이회창 39.4% - 이인제 43.4%(한겨레신문 2월12일자), 이회창 42.2% - 이인제 41.7%(조선일보 1월1일자) 등으로 접전양상이다.

가상대결에서 노 장관은 이회창 총재와 비슷하거나 조금 밀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김중권 대표와 한화갑 최고위원의 지지율은 이 총재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겨레 신문 조사에서 '민주당의 차기 대선후보 적임자'를 물은 결과 이인제 최고위원이 35.8%로 선두였고, 그 다음으로 노무현 장관(13.1%) 고건 서울시장(9.8%) 정동영 최고위원(7.9%) 김중권 대표ㆍ한화갑 최고위원(각 4.5%) 김근태 최고위원(4.4%)의 순이었다.

대중적 지지도가 당내 경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과 당내 세력기반 등이 대의원의 표심 결정에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뜻이 이인제 최고위원에게 있다는 징후는 아직 감지되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청와대 쪽에서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해 우호적 언급을 하거나 그렇다고 나쁜 얘기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 같다"며 "김 대통령의 의중은 안개 속에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 대통령은 최근 "김중권 대표를 중심으로 당을 잘 운영하라"는 말을 하며 김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어 다른 주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김 대표 스스로 보폭을 넓히며 사실상의 대권행보를 하자 이 위원 캠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김 대통령이 김 대표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대권후보로 밀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레임덕(권력누수)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시적 관리자로 쓰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측근은 "김 대표의 여론 지지도가 계속 상승곡선을 그린다면 김 대통령은 김 대표를 기꺼이 대권주자로 키울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측은 "김 대표의 비중이 커질 경우 영남권 기반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선에 나설 경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김 대표에게 힘이 쏠릴 가능성에도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며 자심감과 경계심이 교차하는 분위기를 전했다. 어쨌든 '김심(金心) 잡기'에서 이 위원은 김중권 대표를 비롯한 강적들과 경쟁해야 한다.


당내 후보들 합종연횡이 최대변수

당내 기반에서는 동교동계에 뿌리를 둔 한화갑 최고위원 세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최고위원 경선때 한화갑 최고위원은 1위를 차지했고 이인제 최고위원은 2위를 했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의 당내 기반도 의외로 만만치 않다. 15명 가량의 의원이 이인제 최고위원의 직계로 분류된다.

이용삼 원유철 홍재형 이희규 이근진 문석호 유재규 전용학 정장선 의원 등이 그와 가깝다. 자민련으로 이적한 송영진 송석찬 의원도 이인제 계보다.

김중권 대표는 현재 직계 세력을 폭 넓게 다져놓은 상태는 아니다. 당내에 고려대 출신이 대거 주요 당직에 포진하면서 신주류가 형성되고 있는데 이들이 김 대표의 잠재적 우군이다. 반면 원외로서 당밖에 있는 노 장관은 원내 기반이 취약하다.

아직은 이인제 최고위원을 비롯, 누구도 대세를 장악하지 못했다. 주요 인사간의 합종연횡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한화갑 최고위원은 이인제 최고위원과 거리를 두고 있으나 김중권 대표, 노무현 장관과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이인제 최고위원이 한 최고위원에게 손짓하며 접근하고 있고 한 최고위원측도 '대권-당권 분리'카드로 연대 파트너를 폭 넓게 고르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용(龍)들간의 짝짓기가 어떻게 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말을 아끼며 때를 기다리는 이인제 최고위원이 올 가을쯤 어떤 화두로 승부수를 띄울지 주목된다.

김광덕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0 17:42


김광덕 정치부 kd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