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국정원장, 미국 간 사연?

'말 못할 사정' 추측 난무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조율인가, 아니면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울답방의 사전수순인가. 2월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의 미국 방문에 쏠렸던 내외의 관심은 이 두 대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임 국정원장의 방미일정이 끝난 지금의 시점에서는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을 미국측에 설명하고 양국간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번 방미의 무게중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 국정원장의 방미는 시기의 미묘성, 대북정책 라인에서 차지하는 임 국정원장의 위상 등으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이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돌아온 다음날인 11일 미국으로 향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정부의 외교책임자가 사전조율을 일단락짓고 돌아와 방미 성과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한 마당에 정보기관의 책임자인 임 국정원장이 서둘러 미국으로 떠나자 '말 못할 사정'이 있지않겠느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김정일 조기답방설 등 꼬리 문 소문

더욱이 그의 방미를 전후로 한 시기에는 중국과 일본을 진원지로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기 서울 답방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한 관련 첩보와 소문이 난무하는 베이징의 경우 올 연초부터 김 국방위원장이 미국의 새 정부를 의식, 가급적 빠른 시기에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문이 외교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었다.

강경보수 색채의 부시 미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정립하기 전에 서울을 전격 방문함으로써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수용하도록 하는 게 김 국방위원장의 구상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나돌고 있었다.

물론 중국발 조기답방설에는 미국측을 견제하려는 중국측 입김도 얼마간 스며있다고 봐야 한다.

또 일본쪽에서도 모 통신사 경영진이 2월 중순 북한을 방문하려 수속을 밟던중 북측으로부터 "김 국방위원장이 서울답방 준비로 바쁘다"는 답변을 듣고 김 국방위원장의 조기답방설이 세를 얻어가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자 임 국정원장의 방미 직후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방미와 조기답방을 연관짓는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꼬리를 물며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북측이 조기답방 의사를 타진했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정부는 당초 4월 중순 김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이후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추진하려 했으나 북한측이 최근 3월 조기답방 의사를 타진해왔고, 이 제의를 수락할 수 밖에 없는 정부로서는 임 국정원장을 미국으로 급파해 조기답방과 남북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한반도 평화문제를 미국측과 조율했다."

이에 따라 국내 언론은 14일자 신문을 통해 '김 국방위원장 조기답방 가능성', '조기답방설' 등의 다양한 제목으로 조기답방 시나리오를 보도했다.

하지만 이같은 관측은 정부 당국자들이 잇따라 공식적으로 부인 발언을 내놓으면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4일 "지금 답방을 얘기할 시점이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사전 조율이 필요한 때"라면서,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15일 "조기답방과 관련해 북측의 메시지를 받은 적은 없다"며 세간의 소문을 일축했다.

이들의 발언은 조기답방설을 진화함으로써 임 국정원장의 방미와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을 연계하는 관측을 조기 차단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임 국정원장과 회담중인 미국측 입장도 어느 정도 감안된 듯 하다.


남북 물밑접촉동향 전달 가능성 높아

사정이 이렇다면 임 국정원장의 방미는 부시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대북정책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데 무게중심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지난해 6월13일부터 15일까지의 1차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한 임 국정원장은 이번 방문에서 1차 정상회담에서 논의됐던 사안, 현재 남북이 추진중인 남북 화해협력 사업,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이 논의해야 할 의제 등에 관해 우리 정부의 입장을 심도깊게 설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이라면 미국측도 어느 정도 임 국정원장의 방미를 원했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측은 어느 누구보다도 김 대통령의 심중을 잘 읽고, 북한 속사정에 정통한 임 국정원장으로부터 남북한 양쪽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북정책을 향후 4년간 주도할 부시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현재 전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를 재검토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한 당국자도 "임 국정원장의 방미는 예전에 받았던 미국측의 초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며 미국측 요구가 이번 방미에 적지않게 작용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워싱턴을 방문한 임 국정원장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과 잇따라 만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과의 회담에서 임 국정원장은 북한이 국제무대의 성실한 일원으로 나서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남북대화에도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미국측은 임 국정원장과의 회담에서 주로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후문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최근 진행되고 있는 남북간 물밑 접촉 동향도 상당부분 미국측에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2차 남북 정상회담 준비과정과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이 주고 받을 빅딜 내용도 어느 정도 언급됐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은 임 국정원장과의 회담에서 의기투합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투명성과 상호주의가 미국측 대북정책의 주요 잣대라는 점을 우리 정부에 거듭 설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부시 행정부는 대북정책의 속도 등과 관련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북한으로부터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등에 관해 전향적이고 투명한 입장이 나오지 않는 한 대북관계의 급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대북정책의 속도 등 한미간에 껄끄러운 사안도 자연스럽게 논의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대외정책 혼선등 우려의 목소리도

이번 방미에 거는 우리 정부의 기대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주의제인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한 한미간 의견조율에 모아지고 있다.

임 국정원장은 이번 방미중에 휴전선 주위에 집중배치된 남북한 재래식 병력의 재배치(특히 수도권을 사정권으로 하는 북한의 170mm 자주포와 240mm 방사포 등 장사정포의 재배치), 평화협정체결, 군 인사교류 및 군 직통전화 가동 등 군사적 긴장완화 방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과 스케줄을 미국측에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 국정원장은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동북아 세력균형자로서의 주한미군 역할을 긍정 평가했다는 점을 미국측에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번 방미를 통해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가 모두 논의되고 이에 따른 한미간 정책조율이 매듭됐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2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비한 한미간 초율의 첫 단추라고 보는 게 적절할 듯하다. 한 당국자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이 가시화할 시점에 임 국정원장이나 외교통상장관이 미국을 방문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한편 임 국정원장의 방미의 시기를 둘러싼 잡음도 적지 않게 나왔다. 16일 국회 외교통상위에서 한나라당은 정보기관 책임자가 대북 접촉에 이어 외교교섭에까지 나섬에 따라 대외정책의 혼선은 물론 정보기관의 정체성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또한 외교통상부에서도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임 국정원장 방미 직후 외교부 관계자는 "설마 임 국정원장이 이정빈 장관과 만난 파월 국무장관을 만나겠느냐"며 자조섞인 분석을 내놓았고, 미국 현지 공관에서도 이 장관의 방미 직후라는 시기적 미묘성을 감안해 서운해했다는 후문이다.

이영섭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0 17:47


이영섭 정치부 youn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