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잡힌 신용사회] 신용 불량자를 양산하는 사회

경제활동인구 10명중 1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결혼 2년째를 맞는 주부 이민숙(29ㆍ가명)씨는 요즘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신경과민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참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을 때지만 이씨는 몇달전부터 남편과 시댁 식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결혼 전에 친정 아버지의 빚 보증을 섰던 게 문제가 돼 자칫 남편과 시부모 재산까지 압류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씨에게 불행의 싹이 튼 것은 1997년 여름, 자신 명의로 된 집을 담보로 3,500만원의 대출을 받아 아버지의 빚을 갚으면서부터. 1년 뒤 아버지가 대출금을 갚지못하자 은행은 집달리를 시켜 가재도구에 차압 딱지를 붙이며 식구들을 쫓아냈다.

이씨는 은행을 찾아가 "빚이 아버지의 것이며 집도 실제 내 것이 아닌 아버지 소유"라고 간곡히 사정하자 담당자가 "주택소유권과 채무를 아버지 앞으로 돌리는 채무이행등기를 해주겠다"며 200만원 가량의 이자를 우선 갚으라고 했다.


심각한 경기침체, 신용불량자 늘어나

이씨는 이 말을 믿고 이자를 갚았고 이듬해 봄 결혼을 하게 됐다.

그러다 지난해 3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은행측에서 다시 이씨 앞으로 채무변제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채무를 이행받을 조건이 안돼 채무이행등기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

지난해 말부터 'XX신용정보주식회사'라는 채권추심사로부터 각종 압류통지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밝혀진 채무액은 4,500만원. 중소업체의 사원인 남편의 월급으로는 10년을 갚아도 힘들 액수다.

오랜 고민 끝에 이씨는 이혼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야 아버지를 잘못 둔 죄값을 치르면 되지만 무고한 남편과 시댁 식구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순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후 법원에 소비자 파산을 신청할 생각이다. 본인의 과실과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하는 이씨의 가슴은 아프다 못해 무너지고 있었다.

'신용 사회로의 도약'을 표방하는 우리 사회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있다.

지난해 초 증시 활황과 벤처 열기에 힘입어 잠시 줄어들었던 신용불량자 수가 경기 침체기에 접어든 지난해 중순부터 다시 늘어나고 있다.

은행연합회와 금융권 관계자에 따르면 금융공동전산망에 등록된 신용불량자(법인 포함)수는 지난해 말 240만여명으로 1999년(225만명)에 비해 15만명 이상 늘어났다. 경제활동 인구 10명중 한명 이상이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더구나 이 수치는 지난해 초 소액 신용불량자에 대한 사면조치(약 44만명)를 단행한 이후에 나온 것인데다, 신용불량자의 경우 원리금 연체 후 3개월 이후에야 전산망이 잡히게 돼 있어 지난 연말 기업퇴출과 구조조정으로 발생한 것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늘어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실업 마구잡이식 카드발행이 주원인

신용불량자가 이처럼 늘어나는 원인은 경기침체에 따른 실업 등 구조적 문제와 신용카드사의 과다경쟁에 기인한다.

지난해 대우 부도와 11ㆍ3 기업퇴출 조치로 실물 경기지표는 일제히 하강곡선을 향했다. 반면 실업률은 11월까지 3%대를 유지하다 연말 4.1%(89만3,000명)로 급상승했다. 일자리를 잃은 가장이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대출이나 카드 사용액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세원확보를 위해 연말 소득공제 혜택, 카드 영수증 복권제 실시 등 카드 사용을 장려했고, 카드사도 현금 서비스 한도액을 높이고 발급조건을 완화하는 등 마케팅을 펼쳐 카드 사용액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현금 서비스 한도액을 폐지하기 전인 1999년 4월전만 해도 최고 70만원이었던 신용카드사의 현금 서비스 한도액이 지난해 초에는 최고 1,000만원까지 대폭 늘어났다.

여기에 카드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구잡이식 카드 발급이 과소비를 부추겼다. 방문 권유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이나 백화점 등 어디서나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소득이나 신용 여부와 관계 없이 카드를 발급해준다.

여신 금융협회에 따르면 국내에 4장 이상의 신용카드를 가진 복수 소지자가 현재 420만명을 훨씬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A카드사 연체금을 B카드에서 대출해서 막고, 다시 C카드 현금서비스로 B카드 대출금을 갚는 연체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예비 신용불량자다.

실제로 지난해 20%가 훨씬 넘는 고리를 무는 신용카드사의 지난해 현금서비스(카드론 포함) 매출액은 120조원에 달해 1999년 말(48조원)에 비해 무려 150%나 폭증했다. 일시불, 할부 등 여러 서비스중 유독 단기대출이라고 할 수 있는 현금 서비스 이용액만 더욱 늘어나고 있다.

모여대 1학년인 김모(19ㆍ여)씨는 특별한 수입이 없는데도 5개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한개는 친지의 권유로 했고, 나머지 2장은 길거리에서 'XX 놀이공원 할인', 'XX 휴대폰 할인' 등의 유혹에 빠져 장만한 것이다.

그리고 2장은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급조한 것이다. 김씨는 카드를 돌아가며 서비스를 받아 가까스로 카드 빚을 막고 있다. 김씨는 "카드가 있으면 자제를 하려해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무절제한 소비를 하게 된다"며 "한 동창생은 카드 빚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룸살롱에 나간다"고 귀뜸했다.


기형적 카드사용, 현금서비스 비중이 60%

신용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외국에서 신용카드는 할부나 일시불 구매가 주류를 이루는데 우리나라는 이례적으로 현금 서비스 비중이 신용카드사 매출의 60% 정도를 차지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높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현금 서비스가 더없는 효자지만, 현금 서비스는 즉흥적이고 유흥적인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고율의 이자가 적용돼 사용자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은행 역시 신용불량자 양산의 책임을 면키 어렵다. 지난해 중순부터 증시가 폭락하면서 국내 은행은 시중 유동자금이 몰려들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올해 초에는 회사채 수익률까지 떨어지자 여유자금을 개인에게 대출해주기 위해 일제히 대출 세일에 들어갔다. 일부 은행의 부동산 담보 대출 이율은 7~8%대에 달할 정도다.

하지만 은행 대출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장기업에서 연봉 3,000만원을 받는 회사원은 자기 신용으로 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기도 어렵다.

부동산 같은 확실한 담보가 있는 사람에게는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선심을 쓰지만 신용대출에 있어서는 그 어느 금융기관보다 엄격하다. 타 금융기관에 기존 대출이 있으면 추가 신용대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출이 없다 하더라도 직장인이 신용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최고액은 자기 연봉의 30%를 넘기 힘들다. 대기업에는 수천억원을 빌려줘 떼이면서도 서민에게는 몇백만원도 위세를 부리고 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재산이 있는 연대 보증인을 요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억울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금융권이 대출에는 인색한 반면 대출금이나 이자회수에 있어서는 철저하고 단호하다. 현재 은행이나 신용카드사, 캐피털사 등 신용거래법을 적용받는 금융기관은 대개 두달만 이자가 연체돼도 본인은 물론이고 보증인까지 재산압류 최고통지서를 발부한다.

연체 3개월째가 되면 채무자 본인과 보증인의 재산 가압류 조치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연체 6개월째가 되면 신용불량 거래자로 등록돼 은행을 비롯한 국내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정지된다.

정부는 법이 엄격해 신용불량자를 양산한다는 비난에 따라 올해부터는 신용불량거래자가 된 뒤 90일 이내에 원금과 이자를 변제하면 신용 불량기록을 삭제해주는 쪽으로 신용정보관리규약(종전에는 60일 이내)을 개정했다.


10년간 금융거래 전면 중단

신용불량자(연체 거래자)로 금융권 공동 전산망에 올라가면 10년간 은행 등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전면 중지된다. 사실상의 경제활동이 중단되는 것이다.

채무자들은 이런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워 명동 사채시장 같은 사(私)금융업체로부터 급전을 얻어 은행이나 카드사의 대출금을 상환한다. 하지만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접어드는 길이다.

사금융 업체들은 연간 100%가 넘는 초고금리를 적용하기 때문에 연체기간이 3개월을 넘어서면 원금은 물론 이자 갚기도 불가능해진다. 일단 이런 고리대금의 늪에 빠지면 가진 재산을 몽땅 털리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모 채권추심사 한 관계자는 "일부 채권추심사의 경우 담보 물건이 확실하면 일부러 연체금 납부통지서를 보내지 않고 5~6개월 방치해놓은 뒤 나중에 본인이나 가족의 재산을 압류해 원금과 고리를 뜯어내는 '이자 불리기'수법을 쓰기도 한다"며 "채무자들은 채권자들과 낮은 이자로 합의한 뒤 능력한도 내에서 조금씩 갚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신용불량자의 모임인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www.credit815.org) 발족준비 위원장이자 '블랙리스트클럽'(www.freechal.com/blacklist) 대표인 석승억(33)씨는 "금융기관이 BIS 자기자본 비율 충족과 재무 건전성 확보를 위해 한달 이상만 연체되면 채권 추심에 나서 억울한 신용불량자를 만들어낸다"며 "이자제한법을 다시 도입하고 연대보증제를 폐지해야 하며 채무자에게 최소한의 변제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관련 법규는 소비자보다는 금융기관에 유리하게 돼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증가하는 신용불량자들은 IMF위기 직후의 생계형과는 다른 과소비형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신용사회에서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힌다는 것은 사실상의 경제적 구금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신용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0 17:59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