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발렌타인 데이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집은 월요일 아침이 제일 바쁘다. 주말 내내 뛰어놀다가 밤늦게 잠든 아이들이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안가는 주말이면 더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놀았으니 월요일 아침 아이들이 피곤해할 수 밖에 없다.

피곤해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조금이라도 더 재우려는 애 엄마는 아이들에게 "그러면 시간이 늦어서 스쿨버스는 못 타겠으니 차로 학교에 데려다줄까"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대개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고 한다. 이제 3학년인 큰 아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아이는 스쿨버스 타는 재미를 놓치기 싫어 겨울 아침의 따뜻한 이부자리도 박차고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월요일은 사정이 좀 달랐다. 아무리 스쿨버스를 못 탄다고 하면서 둘째 아이를 깨워도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차로 데려다주어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의 가방을 챙기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오늘 학교 안가면 친구들에게 발렌타인 카드 못준다"고 하자 그토록 꼼짝 않던 둘째도 벌떡 일어나서 결국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주말 내내 삐뚤삐뚤한 글씨로 스무 명이 넘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을 쓰며 준비한 카드를 미리 학교에 가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발렌타인 데이가 가까와지면 전 급우의 명단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모든 학급 친구들과 선생님 앞으로 카드를 만들어 사탕이나 초콜릿과 함께 서로 교환한다. 발렌타인 데이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가방에는 각양각색의 카드와 초콜릿, 사탕으로 가득 차 있는데 친구들과 선생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초콜릿을 먹으며 한껏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매년 2월14일, 대부분의 사람은 빨간 하트가 그려진 커다란 카드를 받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큼직한 장미꽃 다발과 초콜릿 상자도 함께. 물론 우리 꼬마 아이들이 가지고 간 카드에는 큐피드의 화살이나 하트와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요새 유행하는 포키만이나 디지만 등 만화의 주인공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고대 로마신화에 나오는 여신 페브루아투아(Februata)를 기리는 루퍼칼리아(Lupercalia)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사랑의 여신 페브루아투아의 축제로써 고대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잘 나타난 행사인 루퍼칼리아는 매년 2월15일 열렸다.

초기 기독교가 자리잡으면서 이러한 관습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이 바로 성 발렌티누스인데 그는 결혼을 금지시킨 교황의 칙령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여러 쌍의 젊은 남녀를 결혼시킨다. 마침내 발렌티우스는 붙잡혀 처형되는데 그날이 바로 2월14일인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발렌티누스는 감옥에 있으면서 옥지기의 앞 못보는 딸아이의 눈을 고쳐주었고 밝은 세상을 보게 된 이 소녀는 그만 발렌티누스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처형되기 전날 발렌티누스는 그 소녀에게 이별의 편지 한장을 간신히 전했고 물론 그 말미는 '당신의 발렌타인으로부터'라는 말로 끝맺었다고 한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에서 로맨스로 승화된 발렌타인 데이 행사는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고 이때쯤 해서 발렌타인 카드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만 해도 발렌타인 데이 카드는 직접 상대방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때는 우편 요금이 엄청나게 비싸서 보통사람은 우편 서비스를 사용할 엄두도 못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신자 요금 부담이었으므로 비싼 돈 내고 받아본 서신이 원하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 사랑의 고백서라고 생각하면 받은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갈 것이다.

기술 문명이 발달한 요새는 온갖 종류의 발렌타인 카드가 많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빨간 하트에서부터 향기가 나는 향수 카드,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서 보낼 수 있는 전자 칩 카드, 음악을 틀어주는 멜로디 카드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메일 카드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사람은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많은 카드를 발렌타인 데이에 보낸다고 한다. 바쁜 생활로 그동안 소홀했던 직장동료나 옛 친구, 가족 친지들과 따뜻한 사랑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하루이기 때문이다. 발렌타인 카드를 나누어주기 위해 벌떡 일어나는 아이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사랑과 희망을 나누어주기 위해 애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1/02/2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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