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음반] 김민기 노래모음

암울한 세상을 향한 음악적 고백

1971년 1월23일 대도 레코드사에서 출시된 '김민기의 노래모음- 음반번호 EU 716' LP.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앨범인 이 LP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음반'이라는 찬사조차 공허할 정도로 막강했다.

수록된 노래가 대체 뭐길래 그림물감 값이 없어 노래를 시작한 미술학도의 인생을 반체제 혁명가 못지않은 혹독한 탄압과 감시의 고통이라는 가시밭길로 몰아붙였을까? 그리고 온국민은 그의 노래에서 숨막힌 억압의 현실로부터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동시대의 젊은이는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1980년대의 민주화 격량을 지낸 후배에게는 얼굴없이 베일에 가려 차라리 전설과 신화가 되어버린 김민기.

음반 발매 1년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되어 부른 '꽃피우는 아이' 등 3곡의 반정부곡(?) 때문에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됨과 동시에 그의 모든 음반은 압수폐기되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당시 상업성이 없어 베스트 셀러 근처에도 못갔던 그의 음반은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자 오히려 찾는 이가 급증하였다. 김민기의 LP음반을 실제로 보거나 들어본 사람은 흔치 않았건만 구전으로 노래가락과 노랫말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하에서 불법 카피한 카세트테이프를 고가로라도 어렵사리 구해 돌려들을 정도로 그의 LP는 '보이지 않는 국민애창음반'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노래가 수록되어 있기에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김민기의 노래모음' 초판 1면에는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꽃피우는 아이' 등이, 2면에는 '길', '아침이슬', '그날', '종이연', '눈길(경음반)' 등 이렇게 모두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아침이슬'과 '친구'는 누구나 아는 1970년대의 대표적 금지곡이자 국민가요다.

김민기의 음악은 주로 선동적 운동권 노래로만 인식되어 있다. 사랑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가요의 표현한계를 한소절 한소절 은유적인 아름다운 노랫말로 넘어섰다. 바로 그렇게 표현영역을 타파했다는 점만으로도 이제 그의 음악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 '김민기 노래노음' LP는 마니아 사이에 한달 봉급액수인 30만원대의 고가로 거래되었을 정도로 희귀판이 되어버렸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그의 LP는 두번에 걸쳐 무허가로 재출시가 되었다. 1987년 9월5일 현대음반에서 보랏빛의 변형된 자켓으로 먼저 출시되고 3년뒤인 1990년 1월5일에 1971년의 초판과 똑같은 포맷(자켓과 수록곡)으로 또다시 출시되었다.

오리지널 초판은 거의 전량이 훼손되어 고가희귀판이고 재출시된 판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1987년 출시 재판에는 1면의 '꽃피우는 아이'와 2면의 연주곡 '눈길'이 삭제되어 있기에 1990년의 재판을 구해듣는 것이 현명하다.

다만 재판들은 1971년의 초판에 비해 음의 질감이나 해상력에서 원가피 수준에 머무는 아쉬움이 있는데 오리지널 마스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데뷰음반 수록곡 중 1면의 '친구', '저 부는 바람', '꽃피우는 아이', 2면의 '그날' 등은 김민기의 기타연주고, 나머지 곡은 정성조 쿼텟과 김광희의 연주가 퓨전되어 있다.

이제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현란한 플룻 연주를 찬찬히 들어보노라면 30년전의 대중가요가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음반의 최고 화두는 역시 '꽃피우는 아이'다. 수줍은 듯이 억제한 여타 곡의 기타연주와는 달리 연속적으로 퉁겨대는 힘찬 기타 파열음 사이로 애잔하게 파고드는 나즈막하고 읖조리는 듯한 목소리.

화려한 가창력과 백촌도 넘는, 어쩌면 어눌한 그 노래가락의 매력은 들으면 들을 수록 우러나오는 설렁탕의 진국과 다름없다. 30년이란 세월은 야속하지만 LP 음반에서 들려나오는 김민기의 노래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 목소리 그대로다.

최근 김민기는 가수로서 자신의 음악보다 연극과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로에서 학전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김민기는 전설이길 거부하고 우리 곁에서 열심히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더이상 베일에 가린 신비스런 아티스트로 그를 박제화하기보다는 1971년에 그렇게 했듯 이 시대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의 또다른 김민기 노래를 기대하기엔 그가 너무 늙어버렸을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1/02/2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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