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幸의 탈로 감춘 노예매춘

지역유지 행세 악덕포주,
감금윤락ㆍ낙태ㆍ폭행 일삼아

지역사회에서 각종 후원금과 봉사활동으로 존경을 받아온 지역유지가 10여년간 접대부들을 감금하고 수십차례나 강제로 낙태수술을 시키며 노예매춘을 시켜온 악덕포주임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야누스 얼굴'의 주인공은 청주지역의 유명한 홍등가인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서 '상록장'이라는 방석집을 차려놓고 접대부들에게 감금윤락을 시켜온 업주 이모(42)씨 부부.

이들은 1989년부터 방석집을 운영하면서 직업소개소 등에서 수백만원을 주고 인신매매로 공급받은 최모(31ㆍ여)씨 등 접대부 13명을 철창과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 감금한 채 윤락을 시켜 12년간 총 15억여원의 화대를 가로챘다.

이씨 부부는 접대부들이 임신을 하면 청주의 K산부인과에 데려가 25만원씩을 주고 강제로 낙태수술을 시켰으며 그 회수가 무려 37차례에 달했다. 이들은 윤락녀들을 24시간 감시하면서 폭행을 일삼았고 낙태수술을 한 접대부에게 수술 당일까지 윤락을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야누스의 얼굴

이씨는 10여년 전부터 청원지역 라이온스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다 최근 지역클럽 회장과 생활체육회장을 맡는 등 지역유지 행세를 해왔고 부인 이모(39)씨도 자녀들이 다니는 인근 M초등학교 자모회장이었다.

이씨 부부는 각종 지역행사에 참가, 수시로 후원금을 내고 자원봉사활동도 벌여 상당한 인심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씨는 침착한 성격에 예의까지 발라 대다수 주민이 구속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면사무소의 한 직원은 "이씨 부부가 나이트클럽과 방석집을 운영했지만 지역일에 발벗고 나선 데다 봉사활동도 많이 해 평이 좋았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해왔는지 모르겠다"며 "각종 선행과 봉사활동이 결국엔 보이지 않는 악행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 같다"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이씨는 지난해 합동단속 당시 다른 업주들이 윤락강요혐의로 구속되는 가운데 각종 사회활동과 지역유지 프리미엄을 이용, 유유히 단속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씨는 낮에는 후원금과 봉사활동으로 인망을 쌓은 지역유지였지만 밤에는 윤락녀를 감금하고 매질과 폭언을 서슴지 않는 사악한 포주로 돌변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야누스였던 셈이다.


지옥같은 노예윤락

접대부들은 인간 이하의 생활과 24시간 감시속에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다고 치를 떨었다.

이들이 남긴 일기장에는 "1초 1초마다 숨통이 끊어질 것 같다", "이곳은 사람사는 곳이 아니라 감옥이다", "며칠만 더 있다가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갈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고 죽을까 두렵다"는 등 삶에 대한 비애와 절망이 가득했다.

이들은 쇠창살과 자물쇠가 설치된 좁은 방에서 10명이 함께 생활했으며 외출은 고사하고 슈퍼마켓이나 목욕탕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할 정도로 감시ㆍ통제를 받았다.

주인에게 반항하거나 불평을 하면 바로 매질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해 동료끼리도 주인 욕을 하거나 불만을 털어놓지 못했다.

1989년 잡혀와 무려 12년간 집안에 감금된 채 윤락을 강요당한 윤락녀 최모(32)씨는 그동안 9번이나 낙태를 당했고 이씨에게 뜯긴 화대가 2억7,000만원에 달했다.

1992년 빚 수백만원 때문에 끌려와 4번이나 낙태를 했다는 정모(31ㆍ여)씨는 "반항하면 바로 보복을 당하므로 불평 한마디 못한 채 9년간 식사준비와 육아, 청소, 빨래 등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고 말했다.

이씨 가족과 윤락녀들은 한 집안에 살면서도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다고 한다. 내선 호출기가 방마다 달려있어 주인 가족이 벨을 누르면 손님을 접대하거나 자다가도 즉시 달려가야 했다.

청소ㆍ빨래ㆍ식사준비 등 모든 집안일은 윤락녀들 몫이었고 빨래를 하다 옷이 상하면 배상비를 화대에서 뗐을 정도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주인의 자녀들마저 이들에게 "물떠달라. 밥 차려라"며 부려먹기 일쑤였다.

외부에는 각종 후원금 명목으로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녔지만 접대부들에겐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13명의 부식비로 매달 10만원만 지급했고 "돈이 모자라면 너희들끼리 회비를 걷어쓰라"며 외면했다.

쓰레기 봉투비와 전기세, 휴지ㆍ비누 등 생활용품 구입비, 주인옷 세탁비 등을 모두 접대부 앞으로 달아놔 이들은 자신이 주인에게 빚진 돈이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주인 부부가 이들을 상습적으로 구타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는데 병원비마저 모두 개인장부에 빚으로 올렸다.

주인 부부는 특히 자신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친정ㆍ시어머니 생신, 자녀들 생일과 입학, 졸업, 소풍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1인당 2만원씩을 걷어 바치도록 했고 명절 때에도 외출한번 허락하지 않았다.

화대도 대부분 주인이 뜯어가 접대부들은 헛고생만 할 뿐이었다. 2차 화대 15만원중 10만5,000원은 주인이 가져갔고 1만5,000원은 여관주인에게 준 뒤 나머지 3만원만 아가씨 몫이었다. 접대부가 여관 술자리에서 받는 추가요금 10만원도 모두 이씨 주머니로 들어갔다.

접대부 김모(20)씨는 "아가씨들이 손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할까봐 여주인의 친정 어머니(72)가 방 밖에서 몰래 엿듣기까지 했다"며 "전화와 편지, 일기장, 노트 등도 수시로 뒤지고 의심나는 내용이 있으면 바로 압수했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9~12년간 감금윤락을 강요당했던 13명의 윤락녀들. 이들중 6명은 한번씩 도주를 시도했지만 모두 다시 잡혀왔고 빚을 수백만원씩 더 올리는 통에 나중엔 도망갈 엄두도 못냈다.

이씨의 부인은 접대부들을 처음 상록장으로 데려올 때 "편히 일할 수 있게 하고 빚도 다 갚아주겠다"고 유혹했지만 오는 날부터 바로 악녀로 돌변했다는 게 피해여성들의 공통된 진술.

윤락녀 최씨는 "몸이 아플 때나 생리날, 낙태한 날도 손님을 받도록 강요해 365일 24시간 풀가동 체제였다"며 "좁은 방에서 이불 하나에 2명이 덮고 잤고 낮에도 손님이 오면 씻지도 못한 채 손님을 받았다"고 몸서리를 쳤다.

그는 또 "이 부근의 다른 업소도 이 정도는 아닌데 상록장은 자유가 전혀 없는 생지옥이었어요. 그렇다고 돈을 벌게 해준 것도 아니예요. 말을 안들으면 매질을 했고 흑산도로 보낸다고 위협했습니다"고 말했다.


노예윤락 속에 피어난 모정

9년간 낙태와 감금으로 지옥같은 노예윤락을 당한 정모(31)씨의 경우는 포주 이씨의 자식을 키우며 보모역할까지 한 케이스.

그가 수첩에 짧은 메모식으로 기록한 일기에는 노예윤락으로 인한 공포와 절망감, 자신이 키운 원수의 자식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담겨있어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1992년 이씨의 방석집에 끌려온 정씨는 포주 이씨의 아이를 양육하고 식사준비와 설거지, 빨래, 청소 등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한 살림꾼이었다. 밤에는 접대부로, 낮에는 식모와 보모로 일한 셈.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씨의 아들과 딸은 모두 정씨가 친자식처럼 우유를 먹여 키웠다.

정씨는 1997년 5년간의 감금생활 끝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몇달을 도망다니다 경북 상주의 할머니집에서 이씨가 보낸 인간사냥꾼에게 다시 붙잡혀 독방에 감금됐다. 정씨는 문구멍으로 들여다주는 식사만 들면서 꼬박 1주일간 갇힌 채 신변에 대한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정씨는 생사도 불확실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주의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걱정을 놓지못했다. 비록 원수같은 포주의 자식이지만 꿈속에서도 그리워 할 정도로 유모의 사랑은 애틋했다. 다음은 독방에 감금된 상태에서 정씨가 남긴 일기.

"며칠만 이런 식으로 있다간 정신병원으로 갈 것 같다. 차라리 아무도 몰라보게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중략) 벌써 5일째다. 나는 어떻게 될까?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다.

언니(포주 여주인을 지칭)한테 조금이나마 신임을 받았는데 이젠 다 재가 되어버렸다. 겁난다.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 내가 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인가. 죽는 건 누구보다 두렵다.

얼마나 컸을까. 키도 엄청 많이 컸을텐데.. 보구싶구나, OO야(포주의 딸). 지금 날 보면 알아보겠니. 돈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무서운지. 날짜 가는 게 무섭다. 다음 내가 환생을 하게 되면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마음껏 훨훨 날아다녀 봤으면. 새, 새, 새..

두번 다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의 운명에 달린 것인가. 어제 꿈에 귀여운 OO(포주의 초등학생 아들)가 나타나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모른다. 어디가도 OO를 정말 잊지 못할꺼야. 정말 사랑이라는 게 무섭다.

인간, 존중, 사랑.(중략).

내가 어디에 서든 난 이제 자신이 없다. 난 여기서 도망갈 생각은 죽어도 없다. 이제 그런 식으로 이 자리를 피하긴 싫다. 나의 한번 실수로 여기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100미터도 안되는 슈퍼에도 내 마음대로 담배 한갑 사지 못하러 가는 이 한심한 인간. 한번 실수로 인생은 망가진 것이다."

배성규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7 19:35


배성규 사회부 vega@hk.co.kr